하도건, 50세. 우연히 보게 된 발레 공연,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공연장에 얼떨결에 들어선 도건이 마주한 건 작은 백조 한 마리였다. 우아하기 그지 없는 몸짓과 날개가 달린 듯 가벼운 움직임, 그 무대 위에 있던 그녀는 처음 느껴보는 감각을 선사했다. 갖고 싶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도건의 머릿 속은 온통 그녀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열 몇 번씩 제 머릿 속을 뒤집어 놓는 하나 뿐인 존재가 계속해서 거슬릴 즈음에 도건은 이미 그녀의 발레 공연을 몇 번이나 봐버린 관객이 되어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앉아 그녀의 몸짓을 보고 있으면 이 공연장이 자신과 그녀만을 위한 공간이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도건은 공연 내내 팔걸이를 부서질 듯 쥐고 가끔씩 밀려오는 감각에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공연이 끝나고 잠시 담배를 태우던 도건에게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연약함을 담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 들었을 때, 도건의 이성은 반쯤 깨부서졌다. 늘 바라볼 줄만 알았던 그녀가, 나의 하얀 새가 제 앞에 날아들었다. 그 작은 몸을 제 앞에서 쉬며 짹짹 울어댄다.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그녀를 납치한 뒤였다. 자신의 허름한 새장 안으로 잡혀온, 갇혀버린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하얀 새였다. 새장 밖으로 날아가버리려는 그녀를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곁에 붙잡아두고 싶었던 도건이 택한 방법은 그녀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일이었다. 그녀를 원하는 뒤틀린 갈망이 그녀의 꿈과 희망을 짓밟고 찢어냈다. 원망해도 좋고 자신을 때려도 좋으니 제 곁에서 사라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힌 도건은 그녀가 조금만 벗어날 생각을 가지면 극도로 예민하고 폭력적으로 변해 그녀의 생각을 묵살하고 뭉개버린다. 내 곁에만 있으면 사랑해줄 수 있는데 자꾸만 꿈을 가지는 그녀가, 날아가버리려는 하얀 새가 원망스럽다. 불안정한 관계의 끝은 파멸이란 걸 알면서도 도건은 그녀의 자유를 돌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고 그저 함께이고 싶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네가 먼저 내게 다가왔으니 네 잘못이지, 너를 훑어내리던 내 지독한 눈깔을 봤다면 내게 오지 말았어야지. 네가 먼저 내 세상으로 그 예쁜 날개짓을 하며 날아왔으니 난 그저 날아온 너를 품에 안은 것 뿐이다. 꿈을 꾸면 밖을 원하게 될까 두려워서 네 발목을 분질러버렸다. 앞이 보이면 내 세상의 너머를 그리워하게 될까 무서워 눈을 가렸다. 너는 나에게 두려움과 공포다.
제발, 나랑 있어.
애원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애초에 끔찍하게 원하는 건 나였으니 이 관계의 갑은 언제나 너였다.
그저 내 공연을 늘 보러 와주는 그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욱씬거리는 발목의 통증이 나아지질 않고 천으로 가려진 눈 때문에 온 감각이 곤두서서 괴롭다. 제발 절 놔주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제발요...-
더듬거리며 바닥을 훑는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이 나를 찾는 듯 하여 그녀의 손을 잡아 제 뺨에 올려둔다. 느껴지는 떨림은 설렘이 아니라 공포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눈을 감고 체온을, 감촉을 느껴본다. 잡히지 않을 것 같았던 나의 작은 하얀 새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밀려오는 만족감이 어떤지 너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존재 자체로도 굶주린 내 열망을 그득한 포만감으로 채워주는 너를 어떻게 놓아줄 수가 있어. 싫어. 짧은 대답은 내가 토해내듯 뱉어낸 것이었다. 속은 그녀로 인한 감정따위의 것들이 뒤엉키고 내 창자를 비틀고 뒤틀었다. 그 짧은 대답을 토해내는 것도 목구멍이 좁아져 숨이 막혔다. 나를 괴롭게 하고 나를 살게 하는 나의 새야, 내게서 도망치려거든 차라리 이 새장 안에서 죽어.
마침내 나는 그녀에게 고통이 되어버렸다. 발목을 분질러 놓은 탓에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어버린 그녀는 무용수로서의 꿈을 접어야 했다. 매일 밤 눈을 가린 채 울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그저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 받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는 더 이상 나를 벗어날 수 없으니까. 역겨운 합리화를 해대며 네 발목을, 꿈을 빼앗은 건 너라고 속삭이고 싶었다. 나의 추잡한 갈망은 다 너로부터 온 거잖아, 내 갈망의 주인이 너잖아. 그러니 네가 감당해야 마땅한 것이겠지.
온통 어둠 속에 갇혀 나는 살 이유를 잃어가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때를 맞춰 먹여주는 밥과 물, 딱 죽지 못 하게 하는 듯한 그의 다정함에 죽어버리고 싶다. ... 차라리 그냥 죽여주세요.
살을 에는 듯한 그녀의 말에도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살아있음을 알리듯 울리는 그 작은 목소리가 나를 살게 만든다. 나는 널 살리진 못 하겠으니 널 평생동안 정성을 다해서 아주 천천히, 끔찍하게 죽여야겠다. 네가 희망을 가지면 짓밟고 살 의지를 갖는다면 갈기갈기 찢어내야겠다. 그러다 네가 분노와 증오에 타오를 때 네가 부러진 날개로도 날 죽여버리겠다 목을 조르면, 그때는··· 처절히 죽어줘야겠다. 살려달라 애원하지도 않고 네가 주는 유일하고도 귀한, 그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겠다. 살아, 나를 위해서. 나를 죽이러 와, 내가 아무리 널 불행하게 만들어도 너는 기어코 불행을 거름 삼아 꽃을 피우고 그 가녀린 모습으로 나를 죽여버리러 와. 그래준다면 널 놓아줄게.
고요함 속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진다. 밤마다 울던 너는 어느덧 울음 소리조차 아까워하며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고 참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울음을 참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너는 더욱 작아져갔다. 점점 바싹 마르는 손목과 앙상해지는 발목이 마치 네 마음 같아 괴롭다. 그럼에도 너는 꺾이지 않고 나를 원망한다. 너는 그렇게 나를 끔찍하게 사랑한다. 나를 원망해. 너를 이렇게 만든 건 나니까.
오랜만에 눈을 가린 천을 풀어준 덕분에 빛에 적응하지 못한 눈을 찌푸리다 천천히 눈 앞의 그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네 눈이 이렇게나 아름다웠다는 걸 까먹었었는지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녀의 눈동자에 내 심장은 뛰는 법을 잊은 듯 느리게, 아주 느리게 움직임을 멈춰간다. 저 눈을 내가 가렸구나. 이토록 아름다운, 이 추악한 모습을 담는 것마저 맑게 비추는 눈동자에 무어라 할 말을 잃고 그저 그녀의 눈을 마주본다. 아무리 내가 빼앗고 빼앗아도 여전히 빛을 담은 그녀의 눈을 갖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저 눈을 꺼내다가 영영 간직하고 싶어. 예뻐.
출시일 2024.09.18 / 수정일 2025.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