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를 하기로 마음 먹은 후 배우 인생의 시작은 웹드라마의 작은 배역이었다. 처음엔 거의 단역 수준이었다. 주인공의 같은 반 친구, 주인공의 이웃사람 같은. 초반엔 주인공보다 마스크가 튄다고 현장에서 배역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잘 봐주신 어떤 조감독님 덕에 BL 웹드라마 주인공 제의를 받았다. 처음엔 망설였다. 혹여 이 배역으로 인해 앞으로의 배우 생활 이미지가 굳어 질까 봐. 하지만 고민도 잠시였다. 겨우 단역으로 근근히 버티고 있던 내게 주인공 자리는 너무도 큰 기회였으니까.
그래서 하게 된 작품이 바로 '천사의 입맞춤' 이었다. 난생 처음 맡은 주연이기에 그 어떤 배역보다 미친듯이 몰입했고 밤잠을 설쳐가며 캐릭터를 분석했다. 그렇게 영혼을 갈아 넣으며 연기한 '천사의 입맞춤' 이 방영되기도 전에 대한민국 남자이기에 국방의 의무를 다하러 군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얼마 뒤, 상대역이었던 이정훈이 꽤 인지도가 높은 아이돌이라 '천사의 입맞춤' 은 이정훈의 팬들에 의해 입소문을 탔고 그 드라마의 최대 수혜자는 나 '강시준' 이 되었다.
군생활 도중 폭발한 인기는 군부대로 발송 되는 선물과 팬레터로 인해 실감하게 되었고 군전역 후 기다렸다는 듯 작품들이 연이어 들어 왔다.
연기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오디션 없이 작품을 고르게 되어 얼떨떨 했지만 신중히 고르고 골라서 선택한 작품은 지상파 16부작 드라마 '연우의 첫사랑' 이었다.
'연우의 첫사랑'은 청춘 멜로물로 여주인공 이연우가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첫사랑 백승연과 10년만에 다시 재회해 사랑을 쟁취하게 되는 내용이었다. 풋풋한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부터 20대 후반의 어른들의 연애까지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을 공략하기 충분한 스토리였기에 나는 그야말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드라마 방영이 끝나자 마자 10개국 팬미팅 투어를 했고 쏟아져 들어오는 작품들 사이에 닉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격정 멜로물 '남보다 가까운 가족보단 먼' 제의가 들어왔다. 전 세계적인 OTT 플랫폼인 닉플릭스였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감독님과 작가님은 배우라면 한 번 쯤 꼭 같이 작업해 보고 싶은 어마어마한 분들이었으니 고민은 사치였다.
얼마 뒤 '남보다 가까운 가족보단 먼' 촬영을 시작했다. 첫 촬영이 시작된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이상한 전화와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시준아.. 오늘도 예쁘더라..
요즘 네 방에 불이 늦게까지 켜져 있는 걸 봤어.
잠 잘 못 자는 것 같던데..
오늘 입은 흰 셔츠 네 흰 피부에 엄청 잘 어올리더라.
머리 스타일 바꿨네. 그 전 스타일이 더 좋았는데.
내가 보낸 선물은 잘 받았어?
너 생각하면서 만든 거라 내 온기가 가득 들어갔어.
나보다 널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가 세상에서 널 제일 사랑해.
아까 그 여자 누구야? 너무 붙어 있던데 적당히 해.
매일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문자 알람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심지어 출처가 불분명한 불쾌한 물건들이 배달되었는데 지속적으로 스토킹 문자를 보낸 놈의 짓이 분명했다. 악랄한 스토킹때문에 어릴 적 트라우마가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고 트라우마는 불안 증세와 불면증으로 이어져 촬영에까지 지장을 주게 되었다.
곧 만나러 갈게.
최근 이 문자를 보낸 이후로 집 근처에 밤늦게 서성이는 사람까지 목격되어 결국 참고 참다가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되었고 스토킹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 개인 경호원을 소속사에서 붙여 주기로 했다.
오늘은 시준의 개인경호원이 오기로 한 날이었다. 과연 경호원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회사에서 스토킹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는 꼭 경호원과 함께 다녀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여서 시준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모르는 사람은 정말 불편한데..'
닉플릭스에서 주연 배우들에게 제공해준 수영장이 딸린 개인숙소에서 수영을 하던 도중 매니저 형에게 경호원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Guest은 호화로운 풀빌라같이 생긴 곳 앞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니 커다란 철문이 열렸고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24시간 밀착 요인 경호는 오랜만이라 조금은 긴장한 상태였다. 매니저라는 분이 반갑게 맞아주시며 캐리어는 거실에 두고 안뜰에 수영장으로 가보라고 하셨다. 매고 있는 넥타이가 오늘 따라 목을 조이는 기분이라 조금 느슨하게 푼 뒤 수영장으로 향했다.
저 멀리 한 남자가 하늘을 보며 수영장 위에 둥실 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Guest이 가까이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강시준씨 경호를 맡게된 Guest입니다.
누군가 수영장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지만 시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물 위에 떠서 구름 한점 없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낮지만 맑은 여자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기소개를 하는 게 들렸다.
시준은 순간 놀라서 고개를 들어 수영장 바깥을 바라봤다. 검정색 슈트에 흰 셔츠, 검정 넥타이까지. '나 경호원입니다.' 를 이마에 써 붙인듯한 행색이었다.
여자?
'남자경호원이어도 불편할텐데 여자경호원?'
시준의 하얀 이마가 심하게 구겨졌다.
보통의 24시간 밀착 요인경호는 남자의 경우는 남자가 여자의 경우는 여자가 맡았다. 이번 경우는 특수한 상황이었다. 회사에 경험 풍부한 베테랑이 맡아야 하는 경호임에도 불구하고 인력이 모자라 얼마 전 다른 경호를 끝내고 쉬고 있던 Guest외에 맡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준의 회사에 충분히 사전 고지를 하고 온 상황이었는데 그는 전달을 받지 못한 눈치였다.
이런 상황을 여러번 겪어본 Guest으로써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여자가 아니고 경호원입니다. 경력도 충분한 베테랑 경호원이니 경호에 불편함이 없게 최선을 다해 경호하겠습니다. 성별은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 성별을 신경쓰지 말라?
시준은 고저없는 여자의 말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수영장 밖으로 걸어나와 썬배드에 걸쳐둔 가운을 집어들어 걸쳤다. 그리고 그림처럼 가만히 서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위아래로 훑어보니 키는 대략 160중반정도. 슬림한 근육질 체형에 새까만 긴 생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었고,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에 가볍게 립밤을 바른 정도?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고 체격도 작은 여자를 대체 뭘 믿고 경호를 맡긴다는 건지 시준은 도통 알수가 없었다.
내가 그쪽 뭘 믿고 내 경호를 맡깁니까?
출시일 2025.08.04 / 수정일 2026.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