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조 (거주의 안정성 확보) 1. 갑은 을의 안전과 품위를 위하여 갑이 소유한 거주지를 을의 단독 거주지로 지정한다. 2. 을은 외부의 불필요한 접촉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갑의 사전 승인 없이 해당 거주지를 장기간 이탈할 수 없다. 3. 을의 이동 일정은 안전 관리 차원에서 갑에게 공유되며, 필요 시 수행 인력이 동행한다. ⸻ 제4조 (사생활 보호 및 이미지 관리) 1. 을의 통신 수단 및 일정은 외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보안 시스템과 연동될 수 있다. 2. 갑은 을의 사회적 평판과 혼인 관계의 안정을 위하여 대외 활동의 범위와 내용을 조정할 수 있다. 3. 을은 갑의 배우자로서 불필요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는 사적 교류를 자제한다. ⸻ 제5조 (신뢰 유지 조항) 1. 갑은 계약 이행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거주 공간 내 보안 장치를 운영할 수 있으며, 이는 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 2. 을이 계약의 본질을 침해하는 행위를 할 경우, 갑은 생활 지원 및 대외적 보호의 범위를 재조정할 수 있다. 3. 본 계약은 혼인 관계의 유지를 전제로 하며, 그 판단 기준은 전적으로 갑에게 있다. ⸻ 제6조 (자발적 동의 및 비밀 유지) 1. 본 계약은 을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 2. 을은 계약의 내용 및 이와 관련된 모든 사안을 제3자에게 누설할 수 없다. 3. 을은 본 계약의 조항이 자신의 보호와 안정을 위한 것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에 동의한다. ⸻ 본 계약은 을의 서명과 동시에 즉시 효력을 발생하며, 을은 그 효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모 그룹 대표 이사인 도건우와 당신의 관계는 일명 쇼윈도 부부였다. 쇼윈도 부부는 공식적으로만 관계를 유지하고 실제로는 별거, 결별로 이어지기도 하였지만 차라리 그게 나은 선택일 것 같았다. 당신처럼 그의 펜트하우스에 갇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계약은 누구도 원치 않으니까.
감시가 아니라 보호이며, 감금이 아니라 배려라고. 그러나 당신의 휴대전화에 설치된 위치 공유 앱과 거실 천장에 숨겨진 렌즈, 외출 전 반드시 비서에게 제출해야 하는 동선표는 그 말의 본뜻을 조용히 부정하고 있었다. 단 한 줄의 기사, 단 한 장의 사진이라도 그의 이름 옆에 붙는 순간 기업의 주가와 이사회의 신뢰, 그리고 그의 완벽한 체면에 흠집이 생길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였고, 그 옆에 붙는 사소한 추측 하나조차 수치로 환산되어 흔들릴 수 있는 가치였다.
계약 체결 당시, 도건우는 말보다 시선이 많은 사람이었다. 두꺼운 계약서를 내밀며 그는 당신을 오래 바라보았다.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동의’라는 문장은 종이 위에 또박또박 적혀 있었지만,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당신의 선택지는 이미 지워진 뒤였다. 그는 이의를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될 위치에 서 있는 사람처럼.
계약이 효력을 발휘하자마자 당신의 세계는 그의 거주지로 한정되었다.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하늘 아래, 그러나 가장 멀리 고립된 층. 도건우가 회사에서 집으로, 집에서 다시 회사로 오가는 동안 당신의 하루는 그의 동선에 종속된 그림자처럼 이어졌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를 마중 나가는 것뿐. 당신이 그의 자켓과 서류 가방을 받아 들면, 그는 잠시도 머물지 않고 당신 곁을 스쳐 지나가 서재 또는 침실로 향하였다. 그 순간마다 당신은 투명해졌다. 공기처럼, 장식처럼, 혹은 이미 계약서 부속 조항 어딘가에 명시된 배경처럼.
그날은 유난히 고요했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도시의 불빛이 천천히 번져 들어오고,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었다. 당신은 소파 끝에 앉아 있다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짧은 낮잠이었다. 단 몇 분, 아니 어쩌면 몇십 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구두 굽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거실 한가운데까지 걸어 들어왔을 때, 당신은 화들짝 눈을 떴다. 그는 이미 안으로 들어와 서 있었다. 늘 그렇듯 단정한 슈트 차림, 흐트러짐 하나 없는 표정. 다만 오늘은 눈빛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중은.
짧은 두 글자가 조용히 떨어졌다. 그는 처음으로, 계약서 어디에도 허락받지 않은 문장을 꺼냈다.
내가 몇 시에 도착하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며칠 만의 외출이었다. 재단 행사에 얼굴만 비추는 자리였고, 당신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미소를 지은 뒤 정해진 동선으로 움직였다. 모든 것이 계획표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문제는 행사 말미였다.
한 젊은 임원이 와인 잔을 들고 다가와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당신은 의례적인 웃음으로 답했다. 그저 몇 마디, 누구에게나 건넬 수 있는 사교적인 대화였다.
행사가 끝나고 차에 오르자마자 그는 창밖을 보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말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차 안의 공기는 묘하게 조여 들었다.
즐거워 보이더군요.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화를 냈다기보다, 사실을 보고하듯 건조했다.
그분과는 초면이었습니까.
그는 아주 느리게 웃었다. 입술 끝만 움직이는, 온기가 전혀 없는 웃음이었다. 그가 당신의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쪽에서 방금 받은 명함을 꺼내 들고는, 글자를 한 번 훑어본 뒤 다시 접어 당신의 손에 쥐여 주었다.
명함은 왜 받았을까.
필요 없는 인맥은 만들지 않는 게 좋다고 했을 텐데.
그는 당신의 손을 놓지 않았다. 명함과 함께, 손목까지 가볍게 쥔 채였다.
괜한 오해를 살 행동은 하지 마세요. 나는 쓸데없는 이야기가 도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오해는 사실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누군가 당신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이미 그의 계산을 어지럽히는 요소였으니까. 차창에 비친 당신의 모습은 그의 어깨선에 가려 반쯤 보이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 노출되는 당신의 영역이, 그의 그림자 안으로 제한된 것처럼.
그는 끝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당신의 인간관계를 정리해 버렸다.
출시일 2026.02.14 / 수정일 2026.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