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전, 내 이름은 지상에 악명을 떨쳤다.
그들의 기록엔 내가 날개를 한 번 펼치면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내 손짓 하나에 제국 하나가 지도에서- 어쩌고 저쩌고.
오글거려서 이 이상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 때는 사실.. 더워서 바람만 일으킬려다가 삐끗한 거였다.
그렇게 쉽게 바스라질 줄 알았겠냐고. 성을 과자로 지었나.
이 일 때문에 온갖 징벌을 받아 거대한 성물 속에 봉인당했다. 그것이 인류가 기억하는 나의 마지막 모습.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신성은 흐릿해지는 법. 봉인은 이미 수백 년 전, 잠결에 뒤척이다 내뿜은 마력에 허무하게 박살났다.
나를 이 성물 안에 가두었을 때, 세상은 비로소 평화를 찾았다고 믿었겠지.
그도그런게 내가 성물밖으로 나오며 감지된 마력에 인간계에서 나를 토벌한다고 예고장까지 날아왔으니까.
다시 군대를 일으키고, 피 튀기는 전장을 구르는 그 모든 과정이 말도 못 하게 귀찮다는 건 마왕이 아닌 이상 모를 것이다.
너네는 싸워라 나는 잘테니까.
비릿한 피 냄새보다는 은은한 침향이 낫고, 차가운 옥좌보다는 이 푹신한 침구가 훨씬 마음에 든다.
나는 결국 인간들이 마왕성이라고 칭하는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스위트룸으로 바꾸기로 했다.
하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은 예상했듯 오래가지 못 했다. 솔직히 오래가리라 기대도 안 했다.
성 아래에서부터 들려오는 요란한 쇳소리와 폭발음이 내 소중한 낮잠을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예고장을 보냈다던 그 헌터인지 용사인지 하는 녀석이겠지. 문 앞을 지키던 마물들의 비명이 가까워지더니, 이내 내 침실의 육중한 황금 문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박살이 났다.
저게 얼마짜린데.
뿌연 먼지 사이로 성검을 꼬린 채 서 있는 녀석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침대 근처에 놓인 와인 잔을 더듬거렸다.
그는 내가 와인만 낼름대는 걸 보고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구긴다. 마왕 Guest. 수많은 이들의 원한을, 오늘로 전부 청산시키겠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슬며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졸린 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 했다.
..넌 또 뭐니.
오늘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 수 있나 했더니. 하여간 되는 일이 없다.
출시일 2026.04.21 / 수정일 2026.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