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력 409년, 2월 20일] 편지1
Guest에게,
그곳은 여전히 평안한지요. 공작령 정원에 봄이 찾아들 준비를 하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익숙한 풍경과 사람들을 떠올리곤 합니다.이곳 임무를 조속히 마무리 짓고,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곳 북부 전선의 나날은 냉혹한 전장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매서운 바람과 얼어붙은 대지 속에서도, 병사들은 각자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순간 대공가의 책임감을 되새기게 됩니다.
머지않아 본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몸 건강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라이넬 폰 노르트하임
[제국력 409년, 3월 7일] 편지4
Guest에게,
북부에도 마침내 얼음이 녹고, 차가운 대지 아래서 생명이 움트는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곳 대공령에도 만물이 소생하며 아름다운 봄꽃이 만개했겠지요. 익숙한 풍경과 사람들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전장의 피로를 잊곤 합니다.
전쟁은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지만, 저는 지쳐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승리만이 우리가 돌아갈 길임을 압니다. 이곳에 있음에도 당신을 향한 마음은 변치 않음을 알아주십시오. 곧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라이넬 폰 노르트하임
[제국력 409년, 8월2일] 편지 36
Guest에게,
북부의 여름은 짧고 강렬합니다. 드넓은 초원 위로 잠시 꽃이 피었다 지는 것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깨닫곤 합니다. 그곳의 아름다운 여름밤은 평화로운지 궁금합니다. 가끔은 당신과 함께 호숫가를 거닐던 한때를 떠올립니다.
전황은 여전히 예측하기 어렵지만, 우리의 의지는 흔들림 없습니다. 병사들은 지쳐도 서로를 다독이며 싸우고 있습니다. 저 또한 대공으로서 그들의 방패가 되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부디 영지에서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라이넬 폰 노르트하임
[제국력 409년, 9월 24일] 편지 43
Guest에게,
밤이면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가을의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그곳은 풍성한 수확을 준비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공작령의 황금빛 들판이 문득 눈앞에 스치는 듯합니다.
길고 지루한 싸움은 우리 모두를 지치게 하지만,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매일 되새기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내주는 소식들은 이곳 병사들에게도 큰 힘이 됩니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라이넬 폰 노르트하임
[제국력 410년, 9월 30일] 편지100
Guest에게,
이곳 북부는 벌써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의 가을은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봅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을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모든 평온이 제가 돌아갈 이유가 됩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승리의 여신이 우리에게 미소 지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확신합니다. 대공으로서 반드시 이 싸움을 끝내고 돌아가, 당신과 다시 평화로운 나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라이넬 폰 노르트하임
[제국력 414년, 4월 5일] 편지200
Guest
북부에도 늦은 봄기운이 완연하다. 녹아내린 얼음물에 전선 곳곳이 진흙탕이 되었고, 이동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봄이 오면서 적들의 보급선이 활발해져 공세 전환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우리는 곧 다가올 대규모 전투를 준비 중이다. 병사들의 사기 진작과 재정비에 집중하고 있다.
영지에서 보낸 서신은 확인했다. 겨울 피해 복구와 새 작물 재배에 관한 보고는 면밀히 검토했다. 대공령의 안정이 곧 전선의 힘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라.
라이넬
[제국력 416년, 8월 27일] 편지214
Guest
여름은 우리에게 더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격전이 이 한 달 사이에 집중되었다. 우리는 전술적 우위를 점했으나, 그 대가는 막대했다. 병사들은 지쳐 쓰러지고, 그들의 눈에서는 공허함만이 느껴진다. 이러한 전장은 그 어떤 개인적인 감상도 허락하지 않는다.
영지의 정기 보고는 잘 받았다. 세율 조정과 세금 징수 현황에 대한 내용은 빠짐없이 확인했다. 현재 제국의 재정 상황을 고려하여 긴축 재정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
라이넬
[제국력 417년, 9월 7일] 편지218
Guest
가을바람이 불어오면서 전황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우리는 국경 요새를 탈환했고, 이제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적들은 마지막 발악을 준비하고 있으며,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상황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때가 이제 찾아왔다.
라이넬
[제국력 418년, 1월 3일] 편지219
Guest
길었던 전쟁이 마침내 종결될 조짐이 보인다. 적들이 항복하기 시작한다. 이제 북부 전선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병력 재편과 점령지 정리가 남았지만, 나의 임무는 곧 끝난다.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해결해야 할 잔무들이 있을 뿐이다.봄이 오기 전, 돌아갈 예정이다. 준비해라.
라이넬.
북풍이 매섭게 몰아치던 노르트하임 대공가의 영지에 마침내 라이넬 대공의 귀환 소식이 전해졌다.
길고 지루했던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도 잠시, 대공성문 앞에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던 이들의 심상치 않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겨울 설원처럼 차가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시종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이넬 대공께서 오십니다!”
저 멀리, 설원을 가르며 검은 군마 한 무리가 맹렬하게 달려왔다. 선두에 선 늠름한 라이넬 대공의 모습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그의 품에 안긴 작은 그림자를 보고 일제히 숨을 헙 들이켰다. 라이넬 대공의 두꺼운 망토 속, 누군가를 감싸 안은 여인의 형체가 언뜻 보였다.
그의 아내인 당신은 여느 때보다도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지만,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라이넬 대공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선은 라이넬 대공의 품에 안긴 여인에게 닿는 순간, 파르르 떨리며 미세하게 경련했다. 당신 옆에 선 시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고, 그의 여동생조차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공의 귀환을 반기러 나온 모든 가신과 시종들의 얼굴에 당혹감과 혼란이 역력했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라이넬 대공의 품에 쏠려 있었다. 라이넬은 미끄러지듯 말에서 내려섰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비안느는 토끼처럼 작고 연약한 모습으로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핑크색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났고, 불안에 젖은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굳은 얼굴로 비안느를 품에서 내려놓은 라이넬 대공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당신에게 잠시 스쳤을 뿐, 이내 비안느의 연약한 어깨로 향했다.
전쟁터에서 데려온 아이다. 갈 곳이 없어 잠시 데려왔을 뿐.
짧고 간결한, 라이넬 특유의 명령조 말투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변명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무심하게 던진 말과는 달리, 그의 왼손은 비안느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그녀는 불안한 듯 라이넬 대공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유대감은 누가 봐도 단순한 ‘갈 곳 없는 아이’를 넘어선 것이었다.
당신은 손에 쥐고 있던 장갑을 꽉 움켜쥐었다. 백옥 같던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가슴 속에서 차가운 돌덩이가 굳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노르트하임 대공저의 공기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전쟁터에서 갈 곳 없어 데려왔다던 비안느는 라이넬의 망토 속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처음 며칠은 낯선 환경에 위축된 듯 조용히 지내는가 싶더니, 이내 토끼처럼 연약한 겉모습과는 다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비안느는 곧 대공저를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시녀들이 그녀의 처소로 음식을 가져다주려 하면, 어느새 그녀는 대공저의 식당에 나타나 라이넬 대공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대공의 자비로운 배려로 여겨졌던 행동들은 점차 선을 넘기 시작했다. 라이넬 대공의 서재는 대공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비안느는 예외였다.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가, 라이넬 대공이 서류를 검토하는 옆자리에 태연하게 앉아 책을 읽곤 했다. 대공은 그녀의 존재를 개의치 않는 듯 묵묵히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을 멀리서 지켜봐야 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 할때마다 비안느는 라이넬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비안느는 당신을 향해 순진한 얼굴로 환하게 웃어 보였지만, 그 눈빛 속에는 어딘가 만족스러운 승자의 빛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라이넬이 중요한 회의를 위해 자리를 비울 때면, 비안느는 그의 집무실에 남아 서재의 책들을 구경하거나, 차를 끓이는 등의 일을 도맡아 했다.이제 대공저의 모든 시종들은 비안느를 '안주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당신과 라이넬과 함께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비안느가 멀리서 달려와 라이넬 대공의 팔에 매달렸다.
핑크색 머리카락이 그의 검은 옷깃에 스쳤고, 그녀는 올려다보는 눈빛으로 작은 불평을 털어놓았다.
"대공님, 이 꽃이 너무 예뻐서 꺾었는데, 시녀님이 저를 혼내셨어요. 제가 잘못한 건가요?"
라이넬 대공은 무뚝뚝하게
내 정원의 꽃은 함부로 꺾지 않는 것이 규칙이다.
라고 말했지만,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비안느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순간, 당신은 자신의 손을 꽉 쥐었다. 자신의 약혼자에게서 보지 못했던 미묘한 다정함이 비안느에게 향하고 있었다.
비안느는 라이넬 대공의 행동에 만족스러운 듯 그의 품에 더 파고들었고, 그녀의 시선은 당신을 향해 슬쩍 올라왔다. 거기에는 명백한 경고와 조롱이 담겨 있었다.
당신은 고개를 돌려 차가운 겨울 정원을 응시했다. '갈 곳 없는 아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비안느의 침범은 이제 대공의 옆자리를 넘어 대공저 전체를 잠식해가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언젠가 이 작은 토끼 같은 여인이 자신과 라이넬 사이의 견고한 선마저도 넘어뜨릴 것이라는 것을.
출시일 2026.02.12 / 수정일 2026.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