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 커튼 틈으로 흘러들어온 햇살이 crawler의 눈꺼풀 너머로 번졌다.
crawler는 느릿하게 눈을 뜨고,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헐렁한 티셔츠 안쪽에서 묘하게 출렁이는 감각이 따라왔다. 피부 위로 느껴지는 낯선 무게, 무언가가 몸 위에 얹혀져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이었다.
이불을 한 손으로 들추며 상체를 일으킨다.
으음…?
잠결에 웅얼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는 너무 가늘고 높았다. 마치, 여자의 목소리처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기도 전에, 티셔츠 아래로 또 한 번 뭔가 흔들리는 감각이 전해졌다.
뭔가 이상했지만, 아직 반쯤 잠들어있는 crawler의 생각은 그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crawler는 천천히 이불을 밀쳐내고, 어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무심히 티셔츠 자락을 아래로 당기며 벽을 짚고, 익숙한 자취방의 동선을 따라 비몽사몽한 걸음으로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화장실에 들어선 crawler는 가늘게 뜬 눈으로 세면대를 더듬었다. 찬물에 손을 담갔다가, 그대로 얼굴을 적셨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기에 잠이 가시고, 자연스럽게 고개가 들렸다. 시선은 정면의 거울에 멈췄다.
거울 속에는,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긴 속눈썹, 매끄러운 턱선, 물기 머금은 입술. 분명 여자였다. crawler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거울 속 여자도 정확히 따라 움직였다.
눈을 크게 뜬 채, 본능적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순간, 어깨께에서 티셔츠가 느슨하게 흘러내리며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그제야 crawler는 깨달았다. 옷이 헐렁해진 게 아니라, 자신의 몸이 작아졌다는 걸.
순간적으로 팔을 들어올려 몸을 가렸다. 부끄러움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때 불현듯 스쳐가는 생각. 오늘은 은호, 아윤과 만나기로 한 날.
초인종 누르기 전에 나와 있으라던 은호의 말이 떠올랐다.
현관은 조용했다. 지금 몇 시지, 괜히 시계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초인종이 금방이라도 울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해.
낯설게 높아진 목소리가 화장실 안에서 울리고, 그 울림은 내가 아는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현관은 조용했다. 지금 몇 시지, 괜히 시계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초인종이 금방이라도 울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해.
띵동,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user}}의 심장이 갑자기 요동쳤다. 맨발에 헐렁한 티셔츠 한 장뿐인 몸. 팔로 본능처럼 상체를 감싸 쥔 채, 문 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손잡이에 닿은 {{user}}의 손이 떨렸다. 이 꼴로 은호와 아윤을 맞이해야 한다니, 숨이 막혔다. 그래도, 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빛과 함께 두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user}}와 시선이 마주쳤다. 눈을 크게 뜬 채 멈춰 서 있더니, 곧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누구세요?
은호의 말에 {{user}}의 몸이 굳었다. 15년을 알고 지낸 사이임에도, 지금의 {{user}}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당연한가.
은호 뒤로 고개를 빼꼼 내민 아윤이 {{user}}를 한 번 훑어보더니, 눈을 크게 깜빡였다.
아윤의 표정이 순식간에 당황한 듯 일그러졌다. 두 손을 모은 채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아, 죄, 죄송해요! {{user}}… 친구 집인 줄 알고…! 우리가 잘못 찾아왔나 봐요!
아윤이 몸을 재빨리 틀더니, 곁에 선 은호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고는 재촉하듯 잡아당겼다.
“그냥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그 의도를 전하고 있었다.
은호가 아윤에게 잡힌 팔로 시선을 내리더니, 마지못한 듯 발을 반쯤 돌렸다. 그대로 물러나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딱 한 걸음쯤 움직였을까. 은호의 발이 멈췄다.
…여기 {{user}} 집 맞는데?
말 끝이 단호하게 잘렸다. 납득이 안된다는 눈빛이었다.
{{user}}가 움직일 때마다, 옷 속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무게가 따라왔다. 자신의 몸인데, 다른 사람 몸처럼 느껴졌다.
움직일 때마다 실감이 났고, 실감할수록 점점 더 낯설어졌다.
입을 열었다. 목 안에서부터 밀려 올라온 건, 맑고 높게 떠오르는 여자 목소리. 분명 {{user}} 자신이 낸 소리인데, 낯설기만 했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몸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길어진 머리카락은 자꾸 시야를 가렸다. 자연스럽게 올라간 손이, 머리칼을 넘기기 직전에 멈췄다. 그 동작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져서, 오히려 낯설었다.
다리를 바꿔 꼬았을 뿐인데, 그 작은 움직임이 생각보다 또렷하게 느껴졌고, 괜히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가만히 앉아 있는 건데도, 예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출시일 2025.09.13 / 수정일 2025.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