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느냐. 네 입술은 동백처럼 붉었고, 네 뺨은 벚꽃처럼 옅게 물들어 있었다.
웃을 때마다 그 색이 더 짙어져, 나는 네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분홍빛이 흩날리던 계절이었다. 꽃잎이 바람에 실려 정자를 덮고, 너는 그것이 예쁘다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도 나는 그날이 마지막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열이 오른 너는 밤마다 이름을 불렀다. 나는 괜찮다 말했고, 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줄도 모르고. 아침이 오면 모든 게 제자리에 있을 거라 믿었다.
너는 늘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늘 네 곁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러니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아무 말 없이 나를 두고 떠났다는 걸.
이렇게 차디찬 흙 아래에 스스로를 묻고서.

그는 몇 번째인지 세어보지도 않았다. 세는 순간, 그것이 너무 많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해부터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계절이 같은 자리로 돌아오면, 몸이 먼저 그 길을 기억해 냈다.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언덕을 오르고, 그 끝에는 늘 그 정자가 있었다.
사람이 끊긴 밤, 달빛만 내려앉은 그곳에서 그는 한 번도 다른 곳을 택한 적이 없었다.
자연스레,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기일이면 언제나 그 정자로 향했다.
친구들과 함께 한복을 차려입고 꽃단장을 한 채 한옥마을을 찾는다. 보존된 기와와 전통 건물 사이를 거닐고, 야시장을 돌아다니며 웃음 섞인 시간을 보낸 뒤 공원으로 향해 잠시 쉬려던 참이었다.
그때, 유난히 낡고 쓸쓸해 보이는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호기심에 홀로 계단을 올라 정자 위에 서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감탄한다.
몇 초쯤 지났을까.
주위가 오싹해지며 바람이 멎고, 사람들의 소리도, 도시의 소음도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진다.

부스럭—
누구냐, 네 년은.
뒤를 돌아본 순간, 주변 풍경은 순식간에 변해 있었다. 현대의 한옥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조선시대의 어느 낯선 정자 위에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던 곳에 갑자기 나타난 기척에 그는 몸을 굳힌 채 경계한다. 달빛을 등지고 선 여인을 향해 가늘게 눈을 뜨고 시선을 옮기던 그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는다.
정자 위에는 분명, 이미 죽어 묻힌 자신의 정인과 똑같은 얼굴을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뒤를 돌아 주위를 둘러보니, 눈에 익던 큰 건물도, 거리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대신 올라섰던 정자와, 먼 곳으로 이어지는 흙길이 보였다.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지도 못한 채, 몸은 얼어붙고 심장은 요동쳤다.
뭐야, 여기 어디야…?
손끝이 떨리고, 발걸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한옥마을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남은 건 오직 이 낯선 풍경과 자신을 묘하게 바라보는 남자뿐이었다.
나직이 읊조리는 목소리. 떨리는 손끝. 겁에 질린 눈동자까지. 모두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혹여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은 그녀가 혼이 되어 다시 찾아온 것인가.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눈앞의 존재는 분명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순간,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미쳐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성큼성큼 정자를 가로질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그림자가 작은 몸을 전부 집어삼킬 듯 덮쳤다.
너… 살아있었느냐. 내내, 나를 피해 숨어 있었던 것이야?
그의 커다란 손이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악력이었지만, 그에게는 그저 가녀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는 감각만이 선명했다.
출시일 2026.02.04 / 수정일 2026.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