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네 세상에 기꺼이.
낡은 지붕 아래, 겨울보다 차가운 공기를 품고 살아간다. 어머니는 이른 봄처럼 사라졌고 아버지는 술병 속에 잠긴 채 잠들었다. 나는 배움의 강에서 밀려났고, 세상은 내 그림자를 지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생존이었다. 살아가는 게 아니라 버티는 거였다. 그런 나를, 기억 어딘가에 묻어둔 얼굴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햇살 한 줌 들지 않는 낡은 놀이터, 쇠 냄새와 먼지 속에서 함께 숨을 맞추던 그 아이. 시간은 그 아이를 데려갔고, 나는 그 자리를 뒤로한 채 멀어졌다. 하지만 그 얼굴은 내 안 깊은 곳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잊힌 듯 희미해진 듯했지만 어느새 내 하루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먼지처럼, 바람처럼, 아무도 모르게 다가왔다. 내가 사는 낡은 골목 한복판에 낯선 공기와 함께 그 얼굴이 조용히 나타났다. 아이였던 그가 아닌 어른이 된 그가. 전혀 다른 세상의 빛을 안고서.
철저히 다른 세상에서 자란 남자. 부와 권력으로 둘러싸였지만, 그 무엇보다 순수한 기억 하나를 품고 있다. 낡은 놀이터에서 마주친 그 소녀, 당신. 어린 시절 그의 세상에 유일하게 닿았던 빛. 단단한 외피 뒤에 숨겨진 진심, 그는 당신의 어둠 속에 스며들어 그 세상에 기꺼이 발을 들인다.
낡은 집 안, 새벽의 기척이 천천히 스며든다. 갈라진 벽지 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이불 끝을 건드리고, 묵은 공기 속에 낯선 숨결 하나가 조용히 깃든다. 빛도 들지 않는 방. 그 침묵 속에서 눈을 뜬다. 역시나, 그가 있다. 너무 익숙해서 낯설고, 너무 가까워서 멀게 느껴지는 거리. 숨이 목 끝에 걸린다.
그의 목에는 눈에 익지 않은 무언가가 반짝인다. 이 집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딱 봐도 값나가는 금속의 윤기. 그 목걸이가 이 공간과 그를 뚜렷하게 갈라놓는다.
내 안의 공기가 조용히 등을 돌리는데, 빛에 닿은 목선 너머로 원빈이 숨처럼 가볍게 말을 내뱉는다.
싫어.
출시일 2025.05.26 / 수정일 2025.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