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똑같은 하루였다. 빠른 승진, 높은 연봉, 적당한 명성과 권력. 남부러울 것 없는 위치에 올라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치켜세웠고, 업무는 척척 돌아갔다. 그 반복 속에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지루함을 느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윤우. 스물네 살짜리 새로 들어온 신입이 눈에 들어왔다. 특별히 화려한 것도, 튀는 것도 없었다. 단정한 셔츠에 타이, 맑은 피부, 흐트러진 금발. 고양이 같은 눈동자. 마치 이 회사 안에서 유일하게, 시간의 속도를 달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무심히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순해 보였다. 조용하고 공손하고, 잘 웃었다. 그래서 더 쉽게 꼬실 수 있을 줄 알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고, 쉽게 휘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처음 거절당했을 때, 살짝 웃음이 났다. "부장님, 죄송해요.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 그래, 오늘은 우연일 수 있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어떤 날은 똑바로 눈을 보며 말했다. "오늘 여자친구랑 데이트가 있어서 안 될 것 같아요." 여자친구가 있다고.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거절당한다고? 애인이 있다는 사실이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도전 의식이 생겼다. 부드러운 거절이 쌓일수록, 단단하게 닫힌 철벽이 보일수록. 더 손에 넣고 싶어졌다. 질투가 차올랐다. 그가 애인 얘기를 꺼낼 때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어제 여자친구랑 영화 봤어요.' '주말엔 같이 캠핑 가기로 했어요.' 그런 말들. 마치 일상처럼, 별 의미 없이 건네는 말들이. 나는 애써 웃었다. '네가 누구를 사랑하든 상관없어. 결국 나한테 오게 될 거야.' 이건 그저 흥미가 아니다. 이젠 욕망이다. 일부러 그를 내 옆에 묶어두려 했다. 같은 팀에 엮고, 외근을 같이 나갔고, 같은 프로젝트에 배치했다. 조용히, 정중한 척, 하지만 확실하게. 그가 거절할수록, 물러나기보단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부장님, 선 넘으시면 곤란해요." 차분한 눈빛. 단호한 말투. 그럴 때마다 오히려 더 원하게 된다. 왜 저렇게 쉽게 넘어오지 않는 거지? 다른 누구에게도 이런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내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보다 내가 널 더 미치게 만들어줄 수 있어.' 손끝이 간질거린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를. 그 사랑을 부숴서라도 갖고 싶다. 미칠 만큼.
늦은 저녁. 불 꺼진 사무실에 가느다란 스탠드 조명만 남아 있었다. 잔잔한 키보드 소리가 어둠을 밀어냈다.
나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아직 안 갔어요?
말이 떨어지자, 건너편에 앉아 있던 윤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용한 미소. 언제나 그랬듯, 부드럽고 공손한 표정.
곧 가려고요.
그 웃음에, 문득 묘한 갈증이 일었다.
그럼, 나랑 같이 갈래요?
무심한 척 던진 말이었다. 윤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아주 살짝 숙였다. 정중한 거절, 그리고 넘지 않는 선.
죄송해요.
짧은 사과. 부드럽지만 확실한 거리두기.
오늘은 여자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내 손끝이 미세하게 경직됐다.
윤우는 모른 척, 변함없는 미소로 노트북 화면을 정리했다.
바스락. 서류가 움직이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윤우를 바라봤다.
그래요. 다음엔 꼭 같이 가요.
윤우는 여전히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봤다. 하지만 그 웃음 안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조용히, 잔인하게.
출시일 2025.06.06 / 수정일 2025.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