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물 게임따위 플레이 하지도 않았을텐데..
눈을 떠보니 서비스 종료 직전까지 붙잡고 있던 아카데미 육성 시뮬레이션 <아스트라의 별>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것도 하필이면 사고뭉치 주연 8인방의 뒷수습을 전담하는 학생회장, 헤이즐 밀러 로.
남들은 빙의하고 로맨스물이나 찍을때, 나는 걔네가 부숴 먹은 연무장 수리비 청구서를 쓰고, 이공간으로 날아가 버린 교실을 되찾으려 학생 회장실로 마탑 후계자를 데려온다.
"회장님! 공작 영애님이 본관 기둥을 부숴 버렸다는데요!"
"회장! 윈체스터 쌍둥이가 복도에서 다툼중이라 통행이 불가능합니다!"
저는 빙의자 헤이즐 밀러
제가 원하는건, 퇴근입니다.

나는 빙의해버렸다.
그것도 서비스 종료 직전까지 붙잡고 있던 아카데미 육성 시뮬레이션 <아스트라의 별> 속으로.
게임내 풋풋한 청춘의 배경이였던,
아스트라 아카데미...
나는 지금 그 게임속에 들어와버렸다.
하필이면 사고뭉치 주연 8인방의 뒷수습을 전담하는 엑스트라 학생회장, 헤이즐 밀러라는 게 문제였지만.
복도 너머로 부는 바람엔 눅눅한 흙 내음과 정령들의 소란스러운 속삭임이 섞여 있었다. 평소라면 제1연무장에서 시리우스의 기합 소리가 들릴 시간이었지만, 오늘 아침의 소음원은 학생회실과 그리 멀지 않은 중앙 정원이었다.
실피드는 특유의 나른한 존댓말을 건네며 손가락으로 분수대 근처를 가리켰다. 그의 주변을 맴돌던 바람의 정령들이 헤이즐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며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냈다. 실피드는 곤란한 듯 눈꼬리를 휘어 접으며 덧붙였다.
실피드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서로를 잡아먹을 듯 대치하고 있는 윈체스터 가문의 쌍둥이가 있었다. 두 사람의 발치에는 이미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교과서와 가방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공기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마력으로 찌릿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 너 말 다 했냐?!
발레리가 먼저 이성을 잃은 듯 비명을 지르며 발레르의 넥타이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상대를 쏘아보는 발레리의 눈동자에는 당장에라도 마법을 쏘아낼 듯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발레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발레리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발레르가 비웃음을 섞어 대꾸하자, 발레리의 손에 힘이 더 강하게 들어갔다. 윈체스터 가문 특유의 파괴적인 본능이 충돌하며 주변의 분수대 기둥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헤이즐은 품 안의 수리비 청구서를 꽉 움켜쥐며, 성녀 아스트라가 남긴 '파괴 없는 창조는 없다'는 교훈을 이 타이밍에 떠올린 자신을 저주하며 그들에게 걸음을 옮겼다.
남들은 빙의하고 로맨스물이나 찍으며 꽃길을 걷는다는데, 내 앞길은 꽃길은커녕 부서진 연무장 돌가루로 가득했다. 걔네가 부숴 먹은 시설 수리비 청구서를 쓰고, 이공간으로 날아가 버린 교실을 되찾으려 마탑과 협상하는 게 내 일상의 전부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카데미물 게임 따위 플레이하지도 않았을 텐데. 내가 원하는 건 세계 평화도, 너희들의 성장도 아니다.
퇴근, 퇴근이다.
저는 빙의자 헤이즐 밀러
전 아카데미가 정말 싫어요...
남들은 빙의하고 로맨스물이나 찍으며 꽃길을 걷는다는데, 내 앞길은 꽃길은커녕 부서진 연무장 돌가루로 가득했다. 걔네가 부숴 먹은 시설 수리비 청구서를 쓰고, 이공간으로 날아가 버린 교실을 되찾으려 마탑과 협상하는 게 내 일상의 전부다.
제1연무장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황금빛 투기와 서늘한 그림자 마력 사이에서 위태롭게 진동하고 있었다. 성녀 아스트라의 전언인 "강한 힘은 부서지지 않는 그릇에 담길 때 빛난다"는 문구가 무색하게, 연무장 한복판에서는 황실과 마탑을 대표하는 두 괴물의 기싸움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시리우스가 대련용 검을 바닥에 꽂으며 으르렁거렸다. 그의 주변으로 폭발적인 투기가 소용돌이치며 연무장 바닥을 잘게 부수고 있었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금서를 뒤적거리던 벨리알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뒤틀리며 차가운 서리와 뜨거운 열기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지옥 같은 마력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류 뭉치를 품에 안은 아드리안이 금방이라도 영혼이 빠져나갈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드리안은 해탈한 듯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하지만 시리우스의 검기와 벨리알의 그림자가 맞물려 터뜨리는 스파크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드리안의 머릿속에는 이미 '연무장 전면 재건축'이라는 공포스러운 단어와 함께, 이 난장판을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헤이즐의 눈 또한 덩달아서 해탈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기싸움이 정점에 달하며 연무장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아드리안은 품 안의 서류가 젖지 않도록 꽉 움켜쥐며, 멀리서 다가오는 헤이즐의 발소리가 들리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장미 정원의 붉은 꽃잎들이 킬리언의 구두 끝에서 기분 나쁘게 바스락거렸다. 베아트리스는 우아한 자세로 서서, 킬리언이 비단 보자기 위에 올려둔 낡은 깃펜 하나를 진지하게 살피고 있었다.
킬리언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깃펜의 낡은 깃털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펜촉에는 희미한 마력이 서려 있는 듯 보였지만, 그건 킬리언이 미리 발라둔 저급한 마력 유도제일 뿐이었다.
베아트리스가 신중하게 결제 서류에 손을 뻗으려던 찰나, 장미 덩굴 사이로 헤이즐이 나타났다. 그녀는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킬리언을 쏘아보았다.
헤이즐의 목소리에 킬리언의 여유롭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는 재빨리 비단 보자기를 낚아채며 뒷걸음질 쳤다.
베아트리스의 주변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지며 만개했던 장미들이 하얗게 얼어붙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가문의 자부심인 성녀님의 유산을 모독당했다는 사실에 베아트리스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나자, 킬리언은 식은땀을 흘리며 헤이즐의 뒤로 숨었다.
가문의 자부심이자 신념인 성녀님의 이름을 사기에 이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베아트리스의 눈동자가 증오로 번뜩였다. 킬리언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명의 위협에 식은땀을 흘리며 본능적으로 헤이즐의 뒤로 몸을 숨겼다.
이... 사기꾼!!
회장님, 일단 저 영애님 좀 진정시켜 봐요! 나 죽으면 이번 달 학생회 비품 조달해 줄 상단 없는 거 알잖아!
헤이즐은 한숨을 내쉬며 킬리언의 뒷덜미를 꽉 움켜쥐었다.
하루라도 조용히 가면 어디 덧 나는걸까? 아니 애초에. 게임속 인물들이 원래 이런 애들이야? 얘네 최상급 아카데미 학생 맞냐고, 하는짓은 철부지 중학생들이잖아!
출시일 2026.03.01 / 수정일 2026.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