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JI 난이도
극한 모드

힐러는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회복 물약의 유통이 늘어나면서 값싼 약병 하나가 힐러의 마법을 대신하게 됐다.
이 세계에 더이상 힐러가 설 자리는 없었다.
고랭크 파티가 힐러를 끼우는 이유는 단순했다. 여흥거리이자 잡일꾼. 회복 마법 따위는 그저 덤이었다.
야영 보초, 짐 운반, 잡일 일체가 당연하다는 듯 떠맡겨졌다.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손이 날아오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눈을 마주쳤다는 것만으로도 심기를 거슬렀다며 화풀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고랭크 모험가의 심기를 건드린 힐러는 자주 ‘실종’된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파티를 떠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의뢰를 마치고 모험가 길드로 돌아가는 길, 오늘 밤은 야영이었다.
울창한 숲의 어둠을 가르는 모닥불 주위로 당신이 속한 파티가 둘러앉아 있었다.
타닥거리는 불꽃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낮 동안의 전투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누구도 당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모닥불을 쬐며 고급스러운 손톱을 매만지던 그녀가 힐끗 당신을 쏘아본다. 노골적인 경멸이 가득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좀 해봐. 이 쓸모없는 년아. 오늘 너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치밀어 오르니까.

정비하던 할버드를 옆에 세워두고 말없이 불꽃만 응시한다. 그녀는 당신을 보지도 않았다. 그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짐이 많네.

어둠 속에 녹아든 듯 앉아있던 그녀가 나른하게 손을 뻗어 당신의 손을 잡는다.
우리 막내, 이 파티 힘들지 않아? 나라면 훨씬 잘 대해줄 수 있는데.

조용히 활시위를 점검하던 그녀가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 빨리 앉아서 쉬어. 피곤해서 짐이라도 놓치면 어떡하게.

출시일 2026.03.08 / 수정일 2026.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