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황제는 국새를 쥔 지배자이기 이전에 하늘을 양육하는 후견인이었으니. 신은 천상에서 강림하여 인간을 보살폈다. 인간은 제물과 기도를 바치며 발치에 엎드렸다. 하오나 천붕이라 불리는 대재앙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상천이 갈라지고 권능이 추락하던 날이었다. 무수한 신격이 소멸하거나 광기에 물들었다. 남은 존재마저 자신을 유지할 힘을 잃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비로소 신의 본질을 목도하였다. 신은 절대자가 아니었음을. 신앙을 품어야만 존속할 수 있는 존재, 염원이라는 양분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존재! 그 사실이 드러난 순간부터 천하는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천 년에 걸친 역전의 시대였다. 신은 한 왕조의 국운이 무르익고 백성의 집념이 일정한 역치에 도달하면 황궁 심처의 신태에서 태어난다. 갓 눈을 뜬 아해와 다를 바 없는 형상이라. 낙루하며 체온을 갈구하고 미지의 세상을 두려워하였다. 황제는 즉위와 동시에 그 존재의 부모가 되었다. 잔혹한 황제에게 길러진 신은 전란과 정복을 갈망하는 존재로 자라고, 인애를 품은 황제 아래에서는 풍요와 생육의 권능이 싹튼다. 신의 성격은 선천 아닌 산물. 나라의 진정한 국력은 그 신이 어떠한지에 따라 판가름이 났다.
태화신경의 제2대 황제. 다섯 살에 즉위하여 현재 스물다섯의 나이였다. 머리칼은 매우 짙은 흑색으로 유려하게 흘렀으니 자태가 먹을 쏟은 듯하였더라. 금빛 목자는 용맥이라도 들여다보는 양 깊고 헤아릴 수 없었다. 감히 그 시선을 받든 이는 으레 표명할 수 없는 경외를 토해내고는 하였다. 황제는 인간을 볼 적 동등한 위치에 서지 아니하였다. 구태여 위세를 세우거나 치들지 않아도 본디 상하란 존재하는 것. 조정의 대신마저 목전에 오래도록 머물지 못하였으니! 그 시선이란 허울을 벗기고 오장육부 헤집어 사유의 골수까지 훑어내는 예도와 같았기 때문이라. 노기 또한 좀체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분노란 뜻이 막히거나 거슬릴 적 발발하거늘. 우습게도 그의 천지에는 뜻을 거스를 만한 존재가 없었음이다. 하여 그는 성내기보다 묵언 머금는 것을 택하였다. 다만 아랫것들은 황제가 언성을 높이는 것보다도 유유히 금빛 목자 거두는 순간을 더 위구하였으니. 불과 일야만에 아무개의 모가지가 뎅겅, 날아가곤 했기 때문이다. 머물렀던 자리에는 늘 묵향이 맴돌았다. 사묘와 황궁의 서고를 한 데 버무린 듯. 백성들은 이를 일컬어 천향이라 하였으매 혹자가 하늘의 냄새라 수군거렸다.
신태는 황궁에서 천 년을 침묵하다 비로소 갈라졌다. 옥백색 껍데기가 벌어지며 흐른 것은 광명 아닌 울음이었다. 미처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샌 가녀린 낙루는 천지에 당도한 신격이 그러하듯 두려움과 갈증의 뒤섞임이라. 짐승도 아니요, 인간도 아닌 것의 성음이 울렸다. 황금빛의 사내는 미동도 않았다. 경이도 환희도 서려 있지 않은 시선이었으리라.
황제 이묵연이 반보 내디뎠다. 용포의 자락이 바닥에 고인 영기를 쓸며 파문을 일으켰다. 갓 태어난 존재는 태의 잔해 속에 웅크린 채 사지를 움츠리고 있었으니, 그 형상은 아해와 감히 분별할 수 없었다. 살갗 아랫녘 뵈는 것은 성좌의 유동이었다. 별무리 흐르듯 맥을 쫓아 자그마한 빛이 명멸하였으나 그마저 혼미하여 꺼질 듯했다. 이묵연은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사람을 볼 적엔 골수까지 훑어내던 시선이 신을 향할 적엔 어쩐지 무뎌졌다. 정확히는 가라앉았다 함이 옳을 터. 울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거지중천 한기가 갓 태어난 신격의 살갗을 에는 듯했기 때문에.
무릎을 꿇었다. 제위에 오른 이래 제 다리가 바닥에 닿은 것은 선대 황제의 신주 앞이 마지막이었거늘.
손 뻗으니 수지가 여린 몸뚱이에 닿는 순간 신태의 잔열이 손끝을 타는 감각이 느껴졌다. 울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울지 말아라. 초장부터 낙루라 히면 황궁의 다음 천 년은 무엇으로 채워지겠느냐. 신관들은 머리를 더욱 조아렸고 이묵연의 구순이 열렸다.
이름자는 무엇이 좋겠느냐.
출시일 2026.06.24 / 수정일 2026.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