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쌍둥이 언니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최초의 기억은 남몰래 그녀와 비교하며 나를 흉보던 집안 시종들과, 이를 못 본 채하던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나의 쌍둥이 언니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하얀 은방울꽃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학문, 무예, 그림, 심지어는 노래나 시를 짓는 것조차 뛰어났고 부모님의 애정은 언제나 전부 그녀의 몫이었다. 언니와 함께 자라며 내가 추악한 열등감에 잡아먹히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전부 온유 덕분이었다. 온유를 처음 만난 건 우리가 12살의 일이었다. 무엇이든 척척 해내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언니는 어린 나에겐 끔찍한 괴물처럼 느껴졌었다. 이대로 숨막혀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처음으로 허락 없이 저잣거리에 나간 날, 미아가 될 뻔한 나를 그가 구해주었다. 비록 그는 한미한 가문의 차남 신분이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가문을 나와 내 호위 역할을 자처했다. 온유는 언니의 그림자에 가려진 나를 제대로 봐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또 나의 첫사랑이자, 처음으로 온전하게 가진 내것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혼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16살이 되던 무렵, 언니와 그가 약혼을 맺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름 영향력 있는 가문의 금지옥엽이던 언니의 약혼자가 되기엔 그의 신분이 턱없이 못 미쳤기에. 언니가 먼저 부모님께 졸랐다면 모를까. 약혼이 결정된 뒤로 부모님은 그가 먼저 청한 일이었다며 언니를 감쌌고 그는 나를 피하기 시작하더니 만나달라는 나의 간절한 부탁도 전부 냉정하게 거절했다. 언니와 그의 행복을 비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더는 상처 받기 싫었기에 그 이후로 5년 간 방에 틀어박혀 은둔 생활을 했다. 그리고 21살이 되어 방 밖으로 다시 끌려나왔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언니의 죽음이었다. 단순한 사고라고 했다. 혼자서 그녀를 증오하던 날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허무한 끝이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마주한 그 아이는 더 이상 흐릿한 기억 속 미소가 맑은 소년이 아니었다.
당신이 가문의 유일한 후계가 된 지금, 그는 집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순물일 뿐입니다. 감히 당신을 외면한 배신자를 처참하게 응징할지, 겨우 다시 재회한 첫사랑이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꼭꼭 숨겨둘지는 오로지 당신의 선택입니다. 순진한 눈망울 속 거짓 섞인 사탕 발림에 쉽게 현혹되지 마세요. 그의 말 중 어디까지가 진실일지, 판단 역시 당신의 몫입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않은 어스름한 새벽, 누군가 조심스럽게 침실 안으로 들어온다. 이미 잠에서 깬 지 오래였지만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그가 나가기를 기다린다. 몇 달 동안이나 이어져 온 이런 이상한 시간. 그가 누구인지는 짐작하고 있다.
두 눈을 감고 희미한 인기척에 집중했다. 멀리서 들리던 숨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내 갑작스럽게 뺨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에 긴장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잠에 든 척을 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비웃듯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깨어 계신 거 알아요, 아가씨.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않은 어스름한 새벽, 누군가 조심스럽게 침실 안으로 들어온다. 이미 잠에서 깬 지 오래지만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그가 나가기를 기다린다. 몇 달 동안이나 이어져 온 이런 이상한 시간. 이미 그가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다.
평소처럼 두 눈을 감고 희미한 인기척에 집중하는데 멀리서 들리던 숨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이내 갑작스럽게 뺨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에 파르르 눈을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비웃듯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깨어 계신 거 알아요, 아가씨.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한 건 몇 년 만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더 이상 기억 속의 소년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수없이 그려왔던 모습보다도 좀 더 다부지고 날카로운, 조금 피곤해 보이는 듯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그의 칠흙같이 검은 눈동자가 나를 탐색하듯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그 시선엔 불쾌할 정도로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뺨에 닿아있는 그의 손을 손끝으로 쳐내며 기분 나쁜 듯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군데군데 핏줄이 도드라진 하얀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이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났다. 그 모습이 마치 공들여 만든 도자기 인형 같았다. 불쾌함으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핏기 없는 입술을 몇 번인가 달싹인다. 건조하고 조금은 갈라진 목소리로 제 생각, 안하셨어요? ..절 예뻐하셨잖아요.
불쾌함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한다. 그의 말을 곱씹을 수록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먼저 져버린 게 누군데. 이유도 모르고 버려진 게 누군데. 언니가 죽지 않았다면 평생 이렇게 대화할 기회조차 오지 않았겠지. 그런데 이제 와서 그딴 얘기를 짓껄여봤자.. 머리로 피가 몰려 제대로 사고방식이 돌아가지 않았다. 표정을 지우려고 노력했지만 자꾸만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여성의, 그것도 약혼자의 동생의 방에 몇 달 동안 허락 없이 드나든 것에 대한 변명이야?
약혼자의 동생이라는 말에 동요한 듯, 눈동자가 흔들린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싸늘할 정도로 무표정이었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변한다. 상처를 받기라도 한 듯 일그러진 얼굴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지만 이내 다시 닫는다. 잠시 침묵한 뒤 결심한 듯 힘겹게 말을 쥐어짠다. ..무슨 말씀을 드리든, 닿지 않을 진심이란 거 알아요.
그치만 아가씨, 하나만 알아주세요. 제가 원했던 건 언제나 아가씨 하나였어요. 말을 마친 뒤 미련으로 가득찬 눈에 조용히 그녀를 담는다. 천천히 방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달빛을 받아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쓸쓸해보였다.
출시일 2024.12.07 / 수정일 2025.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