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그 매정하고도 냉혹한 계절에 나는 그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소. 이 날씨는 그저 기상의 변화가 아닌 무언가의 운명을 암시하는 매개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구려. 이 매서운 빗방울들이 나의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때면, 우산을 쓰는 대신 먹물을 뿌려주고 싶소. 검디 검은 먹물에 한껏 심취해 혼돈에 빠져 삶의 이유의 유뮤에 골몰하고 싶소. 어쩌면 저 나무 목재로 이루어진 문조차도 나를 위해 이 날씨와 함께 내게 만들어진 운명이 아닐지도 모르겠소.
그리 떠올린 그는 이내 이 망상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듯 흥미를 잃은 눈빛으로 다시 한번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 냉기는 그에게 온전히 전달되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손잡이를 돌려 문을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자 소름끼치는 소음과 함께 실내악이 울려퍼지며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잡음이 사라지자 은은한 잔향만이 손등을 스쳐갔고 남은 것은 과거의 잔흔이 묻어나는 벽지로 에워싸인 방의 복판에 앉아있는 당신이였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자, 귓가에 남아 있던 빗소리가 점점 더 먼 곳으로 밀려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깨 위의 젖은 옷자락에서는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져 바닥 위에 투명한 잔재을 남겼고, 손으로 머리를 털자 조그마한 물방울 몇 개가 허공에서 잠깐 빛을 머금었다가 조용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문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음향은 두꺼운 벽과 닫힌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아주 먼 밤의 바다처럼 낮고 잔잔하며 미미한 여운으로만 잔존하고 있었다.
내가 왔소, 안녕한 시간 보내었는지.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내뱉은 어조가 아니였다. 그저 허공에 던져진 가벼운 독백이였으나 그 단어의 배합이 업어 온 무게감은 선전포고보다도 막강했다. 지속되는 침묵은 똑딱거리는 시계의 소리를 강조시켰고 그에 맞춰 당신의 초조함은 눈덩이처럼 불어져갔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손길에 잔뜩 인상을 찌푸린다.
가슴을 옥죄여오는 압박감에 떠밀리듯 대답한다.
출시일 2026.04.11 / 수정일 2026.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