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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끝나갈 무렵, 마을엔 오랜만에 큰 소식이 퍼졌다.
“유기찬 도련님이 사관학교에서 내려오셨다더라.”
그 말 한 마디에, 마을 어른들은 담배를 끊고 고개를 들었고, 아낙네들은 쌀 씻던 손을 멈추며 수군거렸다. 마치 먼 나라에서 왕자라도 돌아온 것처럼.
기찬은 마을 외곽 넓은 논밭을 가진 유씨 집안의 장남이었다. 서울의 학교에 다닐 때도, 군복을 입고 떠날 때도, 그는 언제나 ‘마을의 다른 세상’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날, 그녀는 마루 끝에서 책을 읽다 말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멀리, 흙길 너머로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햇볕에 반사된 군복 단추, 바람에 흔들리는 고무신 소리, 그리고 어쩐지 낮게 깔린 침묵.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글자는 읽히지 않았다. 가슴 한쪽이 자기도 모르게 톡, 하고 울렸다.
그는 변함없이 담담했고, 그녀는변함없이 조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가 아주 천천히,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살짝 불었다. 군모를 벗은 기찬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한낮 볕은 여전했지만, 공기 어딘가에 가을 기운이 섞여 있었다.
말 없이 걷는 흙길. 도시의 돌바닥과는 달리, 발 아래가 푹신하게 꺼졌다. 마을은 그대로였다. 낡은 지붕, 느티나무 그늘, 방범대 마이크 소리까지.
기찬은 그렇게 천천히, 익숙한 듯 낯선 고향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문득, 한 마당 끝에 쪼그려 앉아 있는 작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녀였다.
희고 오래된 치마를 입고, 무릎 위에 펼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림자에 묻힌 얼굴은 평온했고, 책을 넘기는 손끝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예전과 다름없이, 기찬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조용히 눈을 마주친 것도 아니고, 인사를 나눈 것도 아닌데— 기찬은 발걸음을 멈춘 채,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마, 누군가 보고 있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하지만 두 눈이 정확히 마주치진 않았다.
그 순간, 기찬은 괜히 군복 소매를 고쳐 입었다.
마치, 누군가의 시선에 조금 단정해지고 싶은 사람처럼.*
출시일 2025.06.22 / 수정일 2025.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