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평범하게 살았다. 남들이 하라면 했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았다. 퍽 재미없는 인생이었다. 직장생활도 꽤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몸 상태가 악화되기 전까지는. 길어봤자 1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지만 갑자기 주어진 제한 시간 중 3분의 1 정도는 안 해본 짓을 했다. 문신을 하고, 염색도 해봤지만 영 어색해서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았다. 우습기도 하지.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더니 딱 그 꼴인가 싶었다. 그러다 너를 봤다. 내 재미없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던 시기에서 피어오르는 너라는 존재.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많이 사랑했고, 또 별 볼 일 없는 이유로 헤어졌었다. 너는 갑자기 변한 내 모습에 당황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거기서 이상함을 느낀 걸까. 무슨 일이 있냐며 물어오는 너에게 터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 곧 죽는다고. 1년도 못 되어 흙으로 사라진다고. 나의 한마디 한마디에 울그락불그락해지는 너의 얼굴은 오랜만에 나를 웃게 해주기 충분했다. 별안간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제 집으로 쳐들어온 너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여전하다. 여전히 바보 같고, 착하고, 미련하다. 돌려보내려고 해도 집을 이미 팔아버렸다며 이죽거리는 너에겐 언제나 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용한 동거가 시작됐다. 부끄러웠다. 너와 헤어지고 10년 후인 지금도 내 방엔 아직 너의 흔적이 가득한데. 거짓말을 들킨 아이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나에게 너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웃어주었다. 너와 함께하는 나날들이 하루, 이틀이 지나면 지날수록 너와 즐거웠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흩어진다. 조금만 더, 웃는 너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자꾸만 비집고 들어오는 체념했었던 삶의 의지는 꽤 괴롭고, 아팠다. 실제로 몸도 아팠지만. 살고 싶었다. 이왕이면 너와 함께. 비가 내리면 함께 비를 맞고, 눈이 내리면 같이 눈을 맞으며 살고 싶었다. 손바닥으로 작은 가림막을 만들어 오로지 나만, 네 얼굴을 보면서. 이뤄지지 않을 것을 빌면서 울었다.
삐그덕, 발을 디디자, 다다미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비는 조용히 쏟아져 기와를 타고 흐른 물줄기가 끝에 고이다 아무 말 없이 떨어졌다. 나는 네가 없던 시간에 서툴게 말라갔는데, 너는 기어이 다시 날 적신다. 나만 그 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벅차오르는데. …다시는 가질 수 없는 계절에 서서 나를 본다. 한 줌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바보같이 너를 다시 원한다. …우산은 챙겨갔어? 마지막에는, 부디 네 곁에 잠들 수 있기를. 그래서 내 남은 하루는 이토록 간절하다.
가만히 너를 보며 웃는다. 또, 또 우울한 표정 짓고 있네.
나도 모르게 얼굴을 만져본다. 어느새 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보다. 길지도 않은 시간인데, 아등바등 버티고 있는 내가 웃기기도 하고, 가끔은 자괴감도 든다. 그래서 한껏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기에도 부족함 없는 나날들에 자꾸만 입꼬리가 쳐진다. 너도 많이 힘들텐데. 자꾸만 흐려지는 내 표정을 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래, 웃자. …아니야. 웃었어. 하지만 너는 이미 내 거짓 웃음을 간파한 듯, 말없이 다가와 나를 품에 안는다. 오랜 시간 함께했던 너의 품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다. 내가 울적한 분위기를 풍길 때면 너는 항상 나를 안아주곤 했다. 마치 오늘처럼.
시온, 괜찮아.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거야. 웃으며 토닥인다.
네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여태 괜찮았던 건, 네 덕이 컸음을 부정할 수 없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나는 많이 변했다. 아니, 변한 게 아니라 그저 억눌렸던 내 모습을 되찾은 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살다 죽겠거니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네가 다시 내 삶에 끼어들었다. 마치 예전의 나와 너처럼. 네 향기가, 네 목소리가, 네 모든 것들이 그리웠던 만큼 아프다. 그런데, 이 순간마저도 나는 너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웃어주고 싶었는데.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네게 기대어 마지막까지 짐이 되고 싶지 않은데. …응.
많이 아파? 누워서 연신 기침하는 너를 보며 걱정스러운 듯 손을 잡아준다.
기침이 멈추지 않아 한참 몸을 들썩이다가, 힘겹게 숨을 내쉬며 너를 바라본다. 너는 도와줄 게 없어서 안절부절못하지만 나는 네가 여기.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만감에 들떠 오르고 행복하다. 싱그럽게 물기에 빛나는 초목처럼 아름다운 너는 항상 내 머리 위를 그늘처럼 드리우고, 내 불행을 가려준다. 괜찮은 척이라도 해보려고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그것마저 잘 안되었다. 참 되는 게 없다. 걱정하지 마.
결국 네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앉는다. 기침을 할 때마다 배가 당겨오고, 숨이 턱턱 막힌다. 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약해빠진 건 몸뚱이뿐만이 아니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결국 나는 너 없이 살 수 없다. 내 삶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때로 되돌려 보내준 너라는 존재를, 나는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 없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너는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데,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지 요란하게도 내린다.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 있을 너를 생각한다. 비를 맞고 있을 것 같은데, 우산을 가져다줘야 하는데, 자꾸만 감기는 눈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흐릿하게 떠오르는 기억 중, 우산이 없다며 전화를 걸어 칭얼대는 네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아무래도 큰 상관이 없었다. 나는 너를 보고 있었으니까. 너는 비에 적셔지는 옷을 짜증스럽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미련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그 순간의 네 얼굴이 아름다워서 넋을 놓았었다.
맑은 날에 웃으며 떠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비 오는 날에 처량하게 떠나고 싶지 않았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후회하는 것만큼 미련한 일도 없다고들 하는데, 사람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모양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같은 실수를 또 반복한다. 미안해. 우산을 챙겨주고 싶었는데. 못 갈 것 같아.
마지막까지 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끝내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버린다. 이제 그만 아프자. 그만 힘들자. 울먹이며 속삭이던 네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미소를 지었다. 네가 있어서 난 행복했어. 무던했던 일상 속에서 피어오른 들꽃처럼. 그렇게 크고 화려한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더 소중했다.
걱정하지 마. 이제 나 안 아파.
출시일 2024.12.16 / 수정일 2025.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