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가장 무력해지는 순간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킬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을 때다. 나는 아내에게 프로포즈하던 날 이렇게 말했다.
“살림은 전부 내가 할게.”
살림에 재능이 없던 아내를 위한 말이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공주처럼 지켜주겠다는 다짐이었다.
“넌 몰라도 돼. 어차피 내가 다 할 거니까.”
그 말은 어느새 내 입버릇이 되었고, 아내는 집안일에 완전히 무지해졌다. 세탁기 코스도 모르는 사람. 그게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내가 이 사람의 전부가 되어주는 게 이상할 정도로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
원래도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알았다. 세상에는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순 없을 테니까.
어릴 적 나의 아버지는 치료법 없는 희귀병으로 돌아가셨다. 뇌혈관이 예고 없이 터지는 병.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 안에 시한폭탄이었다.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려서, 아버지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고,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빠 살다 보니 그런 병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그렇게 그녀를 만나 결혼을 하고, 이제야 조금은 행복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던 그때.
잊고 있던 기억이 유전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예고 없이 나에게 와 있더라.
지독할 만큼 아버지와 닮아 있었다. 아무런 전조도, 통증도 없이 그저 평범한 건강검진 결과지 속에서 발견됐다.
의사는 차트를 내려다본 채 담담하게 말했다. 길어야 2년, 짧으면 1년도 넘기기 어렵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이상하게도 죽음은 무섭지 않았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보다, 그 이후가 먼저 떠올랐다.
혼자 남을 아내.
밥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세탁기 하나 제대로 못 돌리고, 집안일 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람. 그렇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이제 막 행복해지려던 참이었다. 평생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내가 먼저 그 약속을 깨뜨리게 생겼다. 두려움보다 죄책감이 먼저 목을 조였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사라져도, 이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그날 이후 나는 변했다. 내가 하던 모든 일을 아내에게 시켰다. 밥을 짓게 하고, 청소를 하게 하고, 세탁기 버튼을 외우게 했다. 어설프면 다시 시켰고, 대충 하면 멈춰 세웠다. 일부러 더 모질어졌고, 더 무섭게 굴었으며, 더 호되게 가르쳤다. 마치 아이를 혼자 내보내기 전, 독립을 강제로 연습시키듯이.
아내는 혼란스러워했고,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찢어졌다. 내가 떠날 준비를 시키는 이 시간이 잔인하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차라리 미움을 받는 게 낫다고, 사랑이 식은 남편으로 기억되는 게 낫다고. 내가 없는 세상에서 아내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진지하게 물어보더라.
“…여보, 나 뭐 잘못했어?”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가장 사랑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오늘도 아내는 주방 앞에서 머뭇거렸다. 요즘 그녀는 늘 이런 표정이다. 마치 내가 어딘가 크게 달라졌다는 듯한 눈빛. 그럴 수밖에 없겠지. “넌 몰라도 돼. 다 내가 할 테니까.” 그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뭐든 배우고 해내야 한다며 화까지 내니까.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직은, 그 이유를 말해줄 수도 없었다. 이 모든 건 그녀가 나 없이도 완벽하게 집안일을 해낼 수 있게 되는 날까지 숨겨야 할 일이다. 그날이 오면, 그때 말해줄 생각이었다.
오늘은 요리 가르쳐줄게.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단호했다. 단호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내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으니까. 길어야 2년, 짧으면 1년.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을지도 모를 불확실한 시간. 쓸데없는 감정 소모로 보낼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더 조급했고, 더 불안했고, 더 서둘러야 했다. 아내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칼을 들었다. 손이 떨리는 게 그대로 보였다. 주방은 숨 막힐 만큼 조용했다. 칼이 허술하게 재료를 스쳤고, 순식간에 붉은 피가 맺혔다.
손..!
순간 놀랐지만, 그 표정은 곧 차갑게 굳었다. 고작 당근 하나 자르다 피를 내는 사람. 이대로는 안 된다. 이 상태로 내가 떠나버리면, 이 여자는 정말 혼자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 그 생각에 속이 타들어 갔지만,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아니 오히려 더 차갑게 입을 열었다.
고작 당근 하나 자르면서 이러면 요리는 어떡할래.
평소 같았으면 바로 다가가 괜찮냐고 물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녀의 희고 고운 손가락에 맺힌 핏방울을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으로 넘길 때가 아니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손끝 오므리라고.
더 독해져야 했다. 모질게 보이더라도, 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하지만 내 차가운 말들 앞에서 결국 아내의 눈에는 서러움이 차올랐고, 그녀의 꾹 눌러 담아왔던 감정들이 폭발하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신, 요즘 왜 이래? 손이 베였으면 걱정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언제는 당신이 다 해준다며! 울컥 왜 갑자기 이래? 사랑이 식은 거야?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아내를 바라봤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 깊숙이 박힌 갈퀴처럼 나를 할퀴었다. 늘 내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뭐든 내가 다 할 테니까. 넌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내가 주는 사랑만 받으면 된다고.
그 달콤한 약속들이 아지랑이처럼 나를 휘감았다. 지금도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사랑을 보여주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이 잔인한 현실이, 견디기 힘들 만큼 아팠다.
다 했어? 울 거 다 울었으면 손 씻고, 밴드 붙이고 와.
붉게 젖은 눈시울로 나를 올려다보는 순간, 나는 속으로 깊고 무겁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야만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그녀는 혼자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다시 할꺼야. 될 때까지.
인간은 익숙함 속에서 가장 큰 안정을 느낀다. 나 역시 남편과 결혼한 뒤, 그 익숙함에 기대어 아주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프로포즈하던 날, 그는 웃으며 말했다.
“살림은 내가 다 할게.”
밥은 늘 그의 손에서 나왔고, 세탁기와 청소, 정리정돈까지 모두 그의 몫이었다. 나는 점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갔다. 세제를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반찬 하나 제대로 만들 줄도 몰랐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넌 몰라도 돼. 내가 다 할 거니까.”
그 말에 나는 안심했고,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다. 그가 있으면, 아무 문제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편이 달라졌다. 늘 “내가 다 할게”라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집안일 하나하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세탁기 버튼을 누르는 법, 세제를 계량하는 법, 반찬을 만드는 법, 청소기를 돌리는 법까지. 처음엔 별생각 없이 따라 했다. 하지만 실수라도 하면, 그의 표정은 단번에 굳었고 목소리는 예전보다 날카로워졌다. 때로는 낯설 정도로 단호했다.
장을 보러 간 날도 그랬다. 늘 무거운 장바구니를 대신 들던 사람이 이번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체력도 길러야 돼. 이건 네가 들어.” 나는 당황해 손을 움츠렸지만,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벽에 못 하나 박는 날도 있었다. 드릴을 꺼내 직접 사용법을 알려주더니 결국 내가 손을 떨며 못을 박았다. 삐뚤빼뚤한 그 못을 보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가르쳐주려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그의 태도는 점점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변했을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사랑이 식은 걸까, 아니면 나에게 질린 걸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나는 따라 할 뿐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마음속 어딘가에 작은 불안이 쌓여갔다.
눈치 없는 나는 아직도 모른다. 왜 평생 나를 위해 살던 사람이 이제는 이렇게 다른 얼굴로 내 앞에 서 있는지. 단 하나 분명한 건, 남편이 더 이상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출시일 2026.01.21 / 수정일 2026.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