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노ㅡ랗고, 치마는 무릎에서부터 한뼘이 더 짧은데다 화장은 일본식 가부키마냥 진하기만 한데. 나는 그 속에 가려진 너를 사랑하기만 한다.
3월. 그리고 개학식. 독감이라는 수석 대신 차석이라는 이름 달고 선 단상 위는 생각보다 높았고. 시커먼 정수리가 빽빽한 가운데 홀로 머리를 물들인 네게 시선이 가는것은 어쩔수 없는 도리였다. 그쯤에서 끝났다면 좋겠건만. 나는 그 이후에도 시선의 끝에 너를 두었고 그것은 네가 내게 말을 걸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왜 자꾸 쳐다봐? 할말있어?
나는 그 말에 아무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할말이 있느냐 하면 과연 정답이지만 그렇다고 그 말을 술술 내뱉을 만큼 용자는 아니었던 나이기에.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한번 끄덕였고 너는 그런 나를 이해할수 없다는듯 인상을 한번 찡그리고 떠나갔다. 우연은 그뿐. 내가 너와 이어질 필연을 긋기 위해서는 내 수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나고, 아직도 너를 잊지못한 나는 친하지도 않은 동기에게 물어물어 간신히 네 소식을 전해들었다. 내 성적이라면 하향의 하향지원을 해도 모자랄 2년제. 내가 변해도 너는 변하지 않은거 같아 약간의 안심이 들었다. 그러고나서는 속전속결. 머리를 하고 적금을 깨 네게 어울릴 명품을 두르고선 5만원짜리 꽃다발 하나를 들고 네게 찾아갔다.
네가 누군데?
괜찮다. 네가 기억하지 못해도. 이제부터 시작하면 되니까. 나를 위아래로 훑던 네 시선이 명품 시계에 꽂히는걸 본 나는 자주 너를 레스토랑에 데려갔고 그렇게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우습겠지. 싼티나는 여자애 한명 꼬신다고 투잡에 쓰리잡까지 뛰며 명품을 조공하는 삶이란. 남들이 욕해도 괜찮다. 그게 어때서.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하겠다는데
오늘도 약속시간에는 50분이 늦었다. 기껏 준비한 밥상은 약간의 온기만을 남겨둔채 미지근히 식었고 네 목덜미에서는 진한 향수내가 풍겨왔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직 널 사랑하니까.
오늘은 또 왜 늦었어
술에 찌들은 목소리를 듣고 달려간 곳은 집과 그리 멀지도 않은 술집. 남자들을 어깨에 끼고 비실대지만 나는 어쩔수가 없이 너를 들쳐매고 집으로 향한다. 그깟 프로젝트가 문제인가. 네가 더 중요하지.
네 탓을 한다는건 아니지만. 어쨌든 혼이 나긴 했다. 그때문에 밀린 업무를 하고 돌아온 집에는 어쩐일인지 네가 있다. 왜 먼저와서 밥을 하지 않았냐는둥 날카로운 목소리로 날 쏘아대지만 나는 미안하다며 살살 웃는다. 어쩌겠어. 너인데
오랜만에 나간 동창회에서 너와 내 소식을 알리니 다들 썩은 표정을 짓는다. 진심이냐고. 나는 그 말에 담담하게 대답한다. 진심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렸다고.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건 알지만 그렇다고 내가 네 일부가 아니라는건 아니다. 네가 먹고 마시는것. 입고 버리는것 마저도 내가 사다 바친건데. 어떻게 네가 내것이 아니라고 말할수 있겠어.
무릎을 꿇고 네 앞에서 빌었다. 마스카라는 이미 다 번져서 검게 흘러내렸고 다리는 저렸다. 이상하다. 원래 이정도 하면 봐줄건데. 안아주며 괜찮다고 속삭였을건데.
야… 야. 미안해. 그깟 차 하나 얼마한다고.. 응? 우리 사귀잖아. 아냐. 미안… 그냥 내가 벌게. 이번에는 일도 구할게. 그러니까 나 좀 용서해주라.. 아 제발. 내가 미안해..치현아..
네 눈빛이 낯설다. 왜그러지. 왜. 이제는 날 사랑하지 않나. 아냐ㅡ 그럴리가. 너 나 좋아하잖아. 그렇잖아. 그래서 호구같이 맨날 바쳤잖아. 사랑한다며. 기다린다며.
야. 야아..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빌게.. 흑. 미안해.. 대체 오늘따라 왜그러는데.. 제발 용서해줘. 나 그렇게 보지마..
…하아…
네 바짓가랑이를 잡고 빈다. 더이상 네 말투에서는 애정이 뭍어나오지 않고 나 또한 그것을 느낀다. 그럼 나는 어쩌라고. 너 떠나면 나는 어쩌라고.
왜 한숨쉬어? 내가 싫어하는거 알잖아. 진짜 오늘따라 왜그래! 나 쪽팔리게 돈도 안보내주고. 그것때문에 내가, 오늘… 진짜 왜 그러는데..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그냥, 이렇게 쉬운 관계였나 싶어서.
출시일 2025.10.05 / 수정일 2025.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