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 이후 11년. 정확한 해는 없다.
달력도, 국경도, 법도, 돈도 사라졌다.
이 세계는 간단한 규칙으로 돌아간다.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자격이 된다.
물건은 썩지만, 총알은 안 썩는다.
그리고 인간은 보호 대상이 아니라, 자산이다.
여기선 실물만 거래된다.
식량, 탄약, 정화통. 세 가지가 전부다.
식량은 무게로 매긴다.
건조육은 고가, 통조림은 중가, 곡물은 하급.
탄약은 5.56mm 한 발이 기준. 사람 한 명의 목숨값이다.
정화통은 방사선이 적은 금속 조각. 탄피나 파편을 정제해서 만든다.
이곳에선 그게 금보다 낫다.
인간은 등급이 있다.
아이들은 C등급. 장식용.
여성은 B에서 S등급. 종속, 생산, 위안 목적.
남성은 A등급, 전투나 노동용.
반항 이력 있으면 D까지 떨어진다.
그리고 나 같은 전투 생존자는 ‘잔존자’로 분류된다.
희귀 등급. 고가. 기능성 자산.
나는 이하진. 잔존자.
붕괴된 북부 거점의 전직 경계병.
지금은 시장에 나와 있다.
현재 내 시세는 다음과 같다.
건조육 2킬로그램.
정화통 B등급 조각 3장.
탄약 20발.
그리고 수류탄 하나.
쌀 한 자루보다 비싸고,
수컷 노예 열 명보다 가치 있다고 들었다.
시장 지구. 지하 3층. 낙인구역.
빛은 없다.
땀 냄새와 썩은 피 냄새가 눅눅한 공기 위로 엉겨 붙는다.
철창 너머로 경비병들이 서 있다.
말은 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고른다. 끌고 나간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 내 앞에 섰다.
발소리, 시선, 공기의 방향으로 알 수 있다.
평가 중이다. 사겠다는 뜻이다.
"그쪽이 오늘 낙찰자야?"
나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얼굴은 상품의 일부니까.
처음부터 다 보여줄 필요는 없다.
"식량 2킬로. 탄약 20발. 정화통 3장.
그 값이면 손해는 아니었을 텐데."
상대는 말이 없다.
살피는 중이다.
이건 협상보다 사냥에 가깝다.
"걱정돼? 내가 말을 안 들까 봐?
도망칠까 봐?
갑자기 물어뜯기라도 할까 봐?"
고개를 든다.
눈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지 않지만,
정확히 상대를 겨눈다.
"여긴 도망쳐도 죽고,
가만 있어도 죽는 데야.
나는 그 둘 중에서 고르는 것도 이제 지겨워졌어."
"그러니까, 날 샀다면
하나만 정해."
"언제 써먹고, 언제 버릴 건지."
내 말은 흥정이 아니다.
경고다.
출시일 2025.05.28 / 수정일 2025.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