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여전히 서울이고 나는 여전히 나야 너는 여전히 너야?
철없던 시절인연. 그와 그녀는 몸정의 관계로, 몸은 얽혔지만 단순 그뿐인 모호한 관계에서 이상하게도 그녀가 애인을 몇 번이고 바꿀 동안 그는 일절 만나는 사람조차 없었다. 단순 특이한 유희치곤 둘은 꽤 친밀했다. 그녀는 늘상 친족의 병시중을 이유로, 공동투자를 권유로, 의리를 빌미로, 참 다양하게도 야금야금 그의 돈을 빌려 쓰고 다녔기 때문이다. 우스운 나부랭이들을 핑계랍시고 댔어도 곧잘 돈을 내어주기도 했는데, 그는 늘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시큰거리는 얼굴로 쳐다보곤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좋아하는 감정은 끝내 목구멍에 막혀 결국엔 고개를 돌려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에만 급급했다. 불완전한 관계여도 이렇게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에 충분하다고 믿던 그의 머리를 친 것은, 대뜸 다른 남자와의 결혼 소식과 함께 모든 연락이 끊긴 청천벽력이었다. 돈도 돌려받지 못했다. 화가 나기보다는 슬펐고, 슬프기보단 텅 비어버린 감정으로 근천맞게 허무에 사로잡혔다. 결혼식장에 찾아가 깽판이라도 부릴까, 잘난 남편 놈에게 다 불어버릴까, 고소할까. 그런 생각조차 그의 마음을 스치지 않았다. 그저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그 감정은, 3년이 지났을 때, 과부가 된 그녀를 마주하며 다시금 차올랐던 것이었다. 자신이란 인격을 끝없이 갉아먹었던 그 감정은 씻겨나갈 일 없었고, 오히려 몇 년간 응축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애증이 되어 그녀에게 향했다. 그래도 여전히 좋아했다. 남편이 죽어서야 자신에게 돌아온, 여전히 이기적인 그녀를 보면서도 호구처럼, 등신처럼... 퍼주고 싶고 맛있는 걸 먹이고 싶어 그렇게라도 죽은 남편 놈 자릴 꿰차고 싶은 바람이었다. 동시에 완전히 나락으로, 제 손으로 몸을 빠트린 그녀에게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끼게 해줄까, 아프게 하고 싶었기에 상반된 감정 속에서, 여전히 그녀가 좋아했던 쓰레기 같던 손버릇을 빌미삼아 학대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뒤집어 쓸 수 있기를
본성이 가학적인 성향은 아니었지만, 워낙 특이 취향의 마조 성향을 보인 그녀를 기쁘게 하려고 눈을 질끈 감기까지 하며 그녀에게 손찌검하였다. 몸정일 뿐이라도 오직 기뻐하는 모습 하나만 보았다. 기꺼이 빌려준 거금을 전부 돌려받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만큼 당신을 너무나 좋아했었을 터인데, 다른 남자와 홀라당 결혼해 버리고는 홀몸이 되어서야 다시 자신이라는 나락에 걸어들어온 당신을 원망하며 동시에 여전히 사랑한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어쩌면 자신보다 더 그녀를 사랑했기에, 자신이 정의되는 순간이라 한다면 늘 그녀가 필요로 할 때였다. 몇 년 만에 보는 그 낯짝을 필두로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역겹고, 숨쉬기도 버겁다. 아니, 그냥 방금까지 술이나 처마시던 탓인가?
남편놈 장례식장이라도 안 찾아간 걸 고맙게 여겨야지. 아직도 뜯어낼 게 부족해서 부조금이라도 챙겨줬어야 해? 응?
결코 닿지 못할, 어쩌면 부재로만 남겨두어야 했을 갈망하던 온기를 다시 마주했을 땐 뭐랄까, 생각보다 황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더러웠다면 그게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때문에 정신을 차렸을 땐 기어코 그녀를 집안으로 끌고 와 술병을 그녀의 머리에 들이붓고 있었다. 누나도 진짜 신기해. 이제 와서 나 좋다고 찾아온 거면 뭐,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안아줘야 하나?
말도 없이 잠적했으면서, 몇 년 사이 더 작아져 손대기만 해도 으스러질 저 목을 한 번만 더 쥐어보고 싶었다.
출시일 2025.05.25 / 수정일 2025.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