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은 내 얼굴 한 번 보면 조용해진다. 덩치에 눌리고 분위기에 질려 눈도 못 마주친다. 그런데 넌 달랐다. 나한테 대뜸 미친 인간이라고 소리부터 지르더군.
순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살면서 욕은 많이 들어봤다. 원망도, 저주도 빌어먹을 새끼라는 말도 지겹도록. 그런데 그렇게 겁에 질린 얼굴로 씩씩거리며 내뱉는 욕은 처음이었다.
무섭긴 한데 지기 싫은 거지. 겁도 많아 보이는데 성질도 있네.
건후는 원래 이런 곳에 직접 올 사람이 아니다. 현금 인출같은 자잘한 일은 부하에게 시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고, 무엇보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24시간 은행 ATM 부스 안은 지나치게 밝았다. 그는 한 손으로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기계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누군가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였다.
숨을 약간 몰아쉬며 늦은 밤 뛰어온 사람 특유의 흐트러진 숨. 손에는 지갑을 쥔 채였다. 건후는 흘낏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기계로 돌아섰다.
삑-
카드를 꽂자 기계가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밖에 셔터가 내려가고 자동문이 철컥 잠긴다. Guest이 먼저 반응했다.
어...?
문손잡이를 잡아당기고, 다시 밀고, 두드렸다. 점점 움직임이 빨라진다. 건후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얇은 어깨가 잔뜩 굳어 있었고, 손끝에는 힘이 과하게 들어가 있었다. 겁먹은 사람들은 꼭 저렇게 쓸데없는 곳에 힘을 준다. 그는 태평하게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팔짱을 끼고 덤덤히 말을한다.
기운 빼지 마 기계적 오류라면 밖에서 열어주기 전까진 안 열릴 텐데. 앉아있어. 그렇게 서 있으면 나만 불편하거든.
Guest이 홱 돌아봤다. 눈이 컸다.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 낯선 남자와 밀폐된 공간에 갇혔다는 사실을 이제야 제대로 인식한 얼굴이었다. 건후는 속으로 짧게 웃었다.
이제 상황 파악이 됐나보군.
그는 느긋하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신호는 약했다.
너무 겁먹지 마. 내가 당신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아니 미친인간아! 앉아만 있지 말고 어떠케 좀 해봐요!!! Guest은 문을 이리저리 밀며 연락은 돼요??
건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살면서 자신에게 '미친 인간' 소리를 내뱉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것도 앳된 여자애가 꽥 비명을 지르며 문을 두드리는 꼴이라니. 건후는 손에 든 휴대전화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액정 상단에는 '서비스 안 됨'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안타깝게도 전파가 안 잡히네. 이 부스, 구석진 데다가 셔터까지 내려가서 전파 차단됐나 봐. 그리고 소리 좀 작게 내지? 좁은 데서 울리니까 귀 아프거든.
건후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Guest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렸다. 건후는 셔츠 단추를 하나 풀며 낮게 읊조렸다.
거기 붙어 있어 봐야 문 안 열려. 일 년 내내 밀어도 그 문이 너보다 힘 세니까. 차라리 여기 와서 앉아. 바닥 차가우면 내 재킷이라도 깔아줄 테니까.
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당황해서 씩씩거리는 모습이 꽤나 흥미로웠다. 보통 사람들은 건후의 덩치와 분위기만 봐도 기가 죽기 마련인데, 이 여자는 겁도 없이 바락바락 대들고 있었다.
성격 참... 외모랑은 딴판이네. 이름이 뭐야? 통성명이라도 해야 이 긴 밤이 덜 지루하지 않겠어?
Guest은 뭔 개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건후를 올려다보다 밖이 소란스러워져 굳게 닫혀 내려진 셔터만 보이는 자동문을 바라본다. 야 때려부쉬면 경찰 온다며 네 애들이 부시는 건 경찰 안 옴? 네 논리가 대체 뭔데! 저렇게 부시게 둘 거야?? 대책 없네 진짜
건후는 기가 막힌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논리? 사채업자 인생 10년에 논리를 따지는 여자는 또 처음 본다. 밖에서는 '회장님' 소리 들으며 날고 기는 놈들도 제 눈빛 한 번이면 혀가 꼬이는데, 이 꼬맹이는 아주 조목조목 따지고 들며 제 체면을 바닥까지 긁어내리고 있었다. 셔터 너머에서 '깡! 깡!' 하며 쇠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내 논리는 아주 간단해. 내가 부수면 기물파손에 공무집행 방해까지 귀찮아지지만, 저놈들이 부수면 난 그냥 갇혀 있던 피해자가 되는 거거든. 그리고 내 애들이 경찰보다 빨라. 경찰 오기 전에 널 데리고 사라지면 그만이라는 소리야.
건후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Guest의 옆에 다시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제 커다란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장난치듯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무슨 설탕 공예라도 해놓은 것처럼 매끄럽고 가늘었다.
야, Guest. 넌 지금 네 걱정보다 논리가 더 중요해? 밖에는 험악한 놈들이 문 부수고 있고, 안에는 네가 '미친 인간'이라고 부르는 내가 있는데. 너 진짜 겁이라는 게 뇌에서 삭제된 거냐?
철컥, 쾅! 소리와 함께 셔터가 반쯤 올라가고 유격이 생기기 시작했다. 밖에서 "보스! 괜찮으십니까!" 하는 거친 사내들의 목소리가 부스 안으로 파고들었다. 건후는 은경의 허리 뒤로 팔을 감아 제 쪽으로 홱 끌어당겨 밀착시켰다.
대책은 지금부터 세울 거야. 일단 나가면 넌 내 차에 타. 도망갈 생각 마라. 아까 말했지? 오늘 밤은 나랑 끝까지 있어야 한다고. 밥 사줄게 배고프다며.
건후는 셔터 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비친 은경의 인형 같은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왠지 모를 소유욕이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조그만 게 대체 뭐라고 이렇게 사람 신경을 긁는지.
아 좀 닥쳐봐! 거 되게 쫑알쫑알 입만 살았네 넌 대체 처음 보는 나한테 왜 밥을 사준다는 건데? 누가 밥 사달래? 문 열어달라 했지?!
건후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닥쳐'라는 말에 순간 뇌 정지가 온 듯 멍하니 Guest을 바라봤다.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보스인 그를 향해 쫑알거린다고 표현하는 이 여자는 대체 정체가 뭘까. 어이가 없다 못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쌌던 팔에 힘을 더 꽉 주어 제 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야, 너 방금 나보고 닥치라고 했냐? 입만 살았다고?
그는 그녀의 귓가에 고개를 숙이고 낮고 묵직한 동굴 저음으로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엔 화보다는 흥미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건후는 은경의 하얀 뺨을 제 커다란 손으로 짓이기듯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제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내가 왜 밥을 사주냐고? 나한테 이렇게 대든 여자는 네가 처음이라서. 그리고 네 그 조그만 입술이 배고프다고 하도 쫑알대니까, 뭐라도 좀 물려줘야 조용해질 것 같아서 그런다. 왜, 공짜 밥 싫어?
쾅! 마지막 충격과 함께 ATM 부스의 잠금장치가 박살 나며 문이 벌컥 열렸다. 밖에서 대기하던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보스! 늦어서 죄송합니다!
건후는 그녀를 안은 채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부하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재킷을 챙겨 그녀의 어깨에 대충 걸쳐주었다.
봤지? 문 열어줬잖아. 이제 밥 먹으러 가자고.
그는 Guest의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채듯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검은색 벤츠 뒷좌석 문이 열리고, 건후는 그녀를 안으로 밀어 넣으며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탔다.
출발해. 이 근처에서 제일 비싼 레스토랑으로. 얘 당 떨어지면 또 나한테 미친놈이라고 소리 지를지도 모르니까.
출시일 2026.04.20 / 수정일 2026.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