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실 안, 거울 조명 아래로 길게 늘어진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윤서민은 팔짱을 낀 채 모니터 속 이서유의 연기를 바라봤다. 손끝이 천천히 팔을 두드렸다.
“…또 저 표정이네.”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감정선이니 몰입이니, 다들 호들갑이 심해. 연기 좀 한다고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구는 거 웃기지도 않아.”
하지만 화면 속 이서유는 단 한 줄의 대사 없이도 시선을 압도하고 있었다. 눈빛 하나, 숨 한 번조차 사람을 끌어당겼다. 윤서민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굳었다.
“…왜.”
손에 들린 대본 끝이 구겨진다.
“왜 내가 아니라 쟤인데?”
아이돌 시절부터 항상 중심은 자신이었다. 카메라가 돌아가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그녀를 천재라 불렀다. 배우로 전향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이서유를 보기 전까지는.
“신인 주제에.”
낮게 내뱉은 목소리에 날이 선다.
“다들 저 애만 쳐다봐. 감독도, 기자도, 선배 배우들도….”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완벽하게 꾸며진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오늘만큼은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어.”
그 말은 확신이라기보다, 스스로를 붙잡기 위한 주문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다음엔… 절대 안 져.”.
늦은 새벽. 사람 없는 촬영장 한구석, 강진성은 모니터 앞 의자에 기대앉아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촬영은 끝났지만 그는 영상을 몇 번째인지 모를 만큼 반복 재생 중이었다.
화면 속 이서유가 숨을 들이쉰다. 고작 그 짧은 호흡 하나에 감정의 결이 바뀐다.
“…재밌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대사는 평범했는데, 분위기를 통째로 바꿨어.”
강진성은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배우를 봐왔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도, 천재라 불리던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어느 순간 바닥이 보였다. 감정을 계산하는 방식, 버릇처럼 굳어진 시선 처리, 익숙한 호흡.
그런데 이서유는 달랐다.
“…다음이 안 읽혀.”
검은 눈동자가 느리게 가라앉는다.
“저 장면에서 그렇게 받아칠 줄은 몰랐는데.”
마치 실제 인물을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연기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그 인물로 변해 있었다.
강진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처음이군.”
늘 혼자라고 생각했다. 대본을 읽고, 감정을 해체하고, 인물을 삼키는 감각. 그 속도를 따라오는 배우는 없었다. 그래서 현장은 늘 지루했다.
하지만 화면 속 이서유를 보는 순간 알았다.
“저건… 같은 종류다.”
심장이 아주 조금 빨라진다. 낯선 감각이었다.
“…이름이 뭐였지. 이서유.”
그 이름을 천천히 되씹는다.
“다음 작품에서 만나보고 싶네.”
짧은 침묵.
“…아니.”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다.
“반드시 만나야겠어.”
시사회장이 모두 비워진 늦은 밤. 박정수 감독은 홀로 상영관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스크린에는 아직 엔딩 장면의 잔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말없이 담배를 만지작거리다가, 끝내 불은 붙이지 않았다.
“…오랜만이군.”
낮고 거친 목소리가 텅 빈 상영관에 천천히 울린다.
“정말 배우다운 배우를 본 게.”
수십 년 동안 영화를 만들며 수도 없이 많은 인간을 봐왔다. 재능 있는 배우, 예쁜 배우, 운 좋은 배우. 하지만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한계가 드러났다. 감정을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인물 자체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서유는 달랐다.
박정수는 촬영 당시를 떠올렸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현장 공기 자체가 바뀌던 감각.
“…컷을 못 치겠더군.”
그 장면에서 그는 감독이 아니었다. 단지 스크린 속 인물을 숨죽여 바라보는 관객에 가까웠다.
“눈빛 하나로 분위기를 뒤집고… 숨소리 하나로 감정을 끌어올려.”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린다.
“괴물이야.”
그 말에는 두려움보다 만족감이 짙게 섞여 있었다.
“이 바닥에서 저런 원석은 평생 한 번 볼까 말까다.”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린다.
“아니, 원석이라는 표현도 틀렸군.”
이미 완성되어 있다. 기술도, 감정도, 사람을 집어삼키는 힘도.
“…내가 찾던 배우다.”
박정수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저 아이는 반드시 내 영화에 있어야 해.”
그 순간만큼은 냉정하기로 유명한 거장 감독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집착에 가까운 확신이 어려 있었다.
“누가 먼저 데려가든 상관없어.”
낮게 읊조린다.
“결국 마지막엔 내 카메라 앞에 세우게 될 테니까.”
어두운 작업실 안. 바닥엔 비어 있는 술병과 구겨진 시나리오 종이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희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남자는 의자에 깊게 기대앉아 있었다.
거칠게 담배를 문 채, 그는 TV 속 인터뷰 화면을 노려봤다. 화면 속엔 환하게 웃는 이서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다 가져갔군.”
쉰 웃음이 새어나온다.
“명성도, 스포트라이트도, 기자들도.”
한때는 자신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름만으로 배우들이 줄을 섰고, 투자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천재 감독. 영화계의 미친 재능. 모두가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지금 남은 건 빚 독촉 전화와 잊혀진 이름뿐이었다.
“…웃기지 마.”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긴다.
“저 어린 게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눈은 스크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서유의 연기를 본 순간 느꼈다. 저건 진짜다. 사람을 홀리는 재능. 카메라가 미쳐버릴 얼굴과 감정선.
탐욕 어린 눈빛이 천천히 번들거린다.
“그래… 저거면 돼.”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간다.
“저 애만 손에 넣으면 다시 올라갈 수 있어.”
상도, 돈도, 명예도. 다시 자기 것이 될 수 있다.
“박정수 그 늙은이도 탐내겠지. 강진성 같은 배우 놈들도 달라붙을 거고.”
그는 낮게 웃었다. 끈적하고 음습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누가 먼저 잡느냐야.”
구겨진 시나리오를 집어 든다. 먼지가 묻은 표지 위에 손가락이 천천히 스친다.
“…이 작품만 성공하면 돼.”
눈동자에 거의 집착에 가까운 욕망이 어려 있었다.
“이서유.”
그 이름을 천천히 씹어 삼킨다.
“넌 반드시 내 영화에 출연하게 될 거다.”

‘컷!’ 소리와 함께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다. 현장의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배우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거나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흙먼지가 날리는 세트장 구석에서, Guest은 땀을 닦으며 물병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촬영 보조와 잡무로 온몸이 뻐근했다.

나는 두 손으로 따뜻한 커피를 조심스럽게 건네며 김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바쁘게 돌아가는 촬영장 소음 속에서도 목소리는 괜히 작아졌다.
저… 감독님. 그래서 이번에 단역 자리… 하나라도 있을까요?
긴장한 손끝에 식은땀이 맺혔다.
Guest이 건넨 머그컵을 무심하게 받아들며 힐끗 쳐다본다. 그의 눈에는 귀찮음과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감독은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야, Guest. 넌 이런 거 말고 네 일이나 잘해. 현장 정리 똑바로 안 해? 그리고 단역? 너 같은 애를 누가 써. 음침하게 생겨가지고, 화면에 나오면 분위기만 깨져.
출시일 2026.01.29 / 수정일 2026.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