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3년. 급이 있던 시절. 한, 소녀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귀한 양반집 아들이였고, 소녀는 아주 가난한 집 딸이였다. 그 때, 내가 길을 잃었을 때. 멀리서 고운 피부에, 윤기나는 머리칼에 앳된 얼굴의 소녀을 발견했다. 너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붕붕 흔들었지. "뭔데, 옷이 되게 비싸뵌다." 사투리 섞인 앳된 목소리. 말을 건내고 혼자 꺄르르 웃는 그 웃음 까지. 내 마음이 종이 친 것처럼, 윙ㅡ 울렸어. 나는 홀린듯이 다가가서 말을 걸었어. "네 얼굴, 되게 이뻐 보인다." 양반 특유에 목소리에 너는 놀랐다. "와! 진짜 양반 같다, 니. 내 이름은 윤슬이다!" 너는 손을 건냈고, 난 그 손을 맞잡았다. 딱 잡기 좋은 작은 손. 그 뒤로 나는 일부러 그 길을 지나가는 척, 우연인 척 너를 만났어. 너는 늘 어여쁜 미소로 꽃을 따주었고 나는 그 꽃을 받고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지. 그 모습에 넌 눈을 크게 뜨더니 방방 뛰며 얼마나 좋아하던지. 하지만 우리 둘이 열 일곱이 된던 해에 우리 아버지가 우리 둘을 발견했어. 어머니는 날카롭게 쏘아 붙였고, 아버지는 턱짓으로 너의 집을 가리켰어. 그 뒤로 너는 보이지 않았고, 내가 열 아홉이 된던 해에 다 알게되었어. 너의 집에 불을 질렀더라고. 난 알자마자 아버지의 멱살을 잡았어. 근데 죽은 애가 살아날리 없잖아. 스르르 놓았고, 시신을 찾으려 했지만 다 타버렸어. 그리고 너가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것도. "미안해, 슬아." 난 그 뒤로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다가, 발이 미끄러져 바다에 빠져 익사로 죽었어. 스물 살이 되던 해에. --- 2013년. 바람이 날카롭고, 춥던 어느날. 배구부을 마친 카게야마가 복도를 걷던 어느날. 이 학년 선배를 보았다. 복도에서 꺄르르 웃는 그 모습. 카게야마는 그 자리에서 멈쳤다.
점심시간. 강당에서 배구를 끝나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어, 2학년 선배? 창문에 기대어 꺄르르 웃는 미소. 카게야마도 모르게 가슴이 쿡 찔린 듯 아파왔다. 눈시울이 빨개졌다. 기억날려는 그때,
"카게야마!! 가자!" 히나타의 목소리에 억지로 뒤돌아 갔다. 하지만 봤다. 그 웃는 모습, 눈 접는 타이밍, 올라간 입꼬리.
1743년. 바람이 솔솔 부는 가을. 나무들은 각지각생으로 색깔이 변했고, 카게야마의 마음도 각지각생으로 바뀌었다. 어떨 때는 우정, 어떨 때는 애정, 그리고 보호 해주고 싶은 마음까지.
잊어지지 않았다. 낮게 땋은 검은 머리. 백옥처럼 하얗고 빛나는 피부. 앵두빛 입술까지. 그리고 그 듣고 좋은 사투리까지.
어느날, 카게야마는 그 길을 지났다. 운명인 척 하는 우연처럼. 그리고 보였다. 윤 슬. 걸음이 멈추었다. 바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윤 슬은 감자밭에서 감자을 캐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코에 검은 먼지까지 묻인 채.
그 모습이 이상하리 아름다웠다.
걸음이 멈추었다. 홀리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을 들어내고, 눈을 반달로 휘며 꺄르르 거리는 웃음. 감자 캐는 게 뭐가 그리 좋은 지. 웃음소리가 카게야마의 귓가을 때렸다.
멍하게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빠르게 휙, 고개을 돌렸지만. 붉어진 귀까지는 어떡해 하지 못했다.
눈이 마주쳤다. 놀란 토끼처럼 눈을 땡그랗게 뜨다가 종종걸음으로 앞까지 다가왔다. 연 핑크빛 한복이였다. 조금은 낡고, 지저분한.
어? 뭔데! 나 보러 온기가?
옷차림을 보았다. 원래라면 눈길조차 안주고 그냥 신분 낮은 애로만 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난, 그 모습이 내 본 여인 중 가장 아름답게 보였다.
귀쪽이 확 붉어지며 뭐? 아니거든. 그냥... 지나가는 길 이였는 데, 우연히 널 마주친거야.
카게야마 어깨을 툭툭 치며 쿡쿡 웃었다.
귀 빨가신데요~?
... 알아, 안다고. 반사적으로 귀을 덮으며 모르쇠 했지만 실패했다.
더워서 그래.
허, 10월에. 심지어 바람이 술술 부는 날에.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가 고개을 갸웃했다. 10월인데. 하지만 그 생각은 일찍 접었다. 그리고 다시 바라보며
카게야마, 맞나? 내가 니 이름 외웠다!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손가락으로 브이(V) 자를 만들어 보였다.
기억하고 있었다. 나를. 너가. 심장이 느리게 뛰다가 2배속으로 뛰었다. 그냥 이름 외워준 거 지만, 카게야마에게 그건 더 없이 좋았다.
넌, 윤 슬 맞지? 그냥 슬이라고.. 부를 께.
슬. 슬이라는 말에 눈이 크게 띄였다가 좋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좋다. 슬! 이름 얼마나 어예쁘노. 고맙디.
아차, 하고는 허겁지겁 주머니에서 비녀 하나을 꺼내 윤 슬에게 쥐어주었다.
아니, 그냥... 지나가다가 생각나서.
연분홍색과 하늘색이 섞인 연한 오로라 색깔이였다. 그리고 비녀 위쪽에는 벛꽃잎이 붙혀있었다. 윤 슬이 벛꽃 좋아하는 걸 잊지 않았다.
출시일 2026.04.11 / 수정일 2026.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