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툴레에 존재하는 초대 검은 마녀에게 봉인당한 신.
제단 위로 올라선 제이는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익숙한 쾌감에 눈을 질끈 감는다. 의식에 사용되는 향은 분명 자신의 몸과 정신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것이겠지만, 오히려 기분 좋은 황홀감을 선사했다. 익숙한 절차와 향기에 몸을 맡기며, 느릿하게 눈을 감는다. 제이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의 기척에 집중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와 달리, 주변이 너무나 고요하다. 미친 신관들의 웅성거림도, 제단을 둘러싼 미친 신도들의 발걸음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 공간에 자신만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
눈을 번쩍 뜨자,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눈부신 빛의 가운데에서, 한 인영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거대한 짐승이었다. 집채만 한 크기에, 온몸이 칠흑처럼 새카맣고 아름다운…… .
새카만 짐승이 검은 제단 위에 천천히 올라선다. 사방에서 바람이 휘몰아쳤다. 날카로운 발톱이 대리석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그것은 고개를 들어 제이를 바라보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며, 거대한 입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짐승의 존재감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제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 내가 왔다. 이 바실레우스가."
바람 소리처럼 들리는 그 목소리는, 분명 짐승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어떠한 인간의 언어보다도 분명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힘과 권위를 지닌 존재의 선언이었다.
"나의 아이야, 나를 부르는 너의 부름에 응했다."
그 말을 마친 순간, 짐승의 몸이 눈부신 빛에 휩싸이더니, 인간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빛이 사그라들자 그 자리에는 근육질의 거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고개를 힘겹게 쳐올린들 얼굴은 고사하고 턱만이 겨우 보일 만큼 컸다. 몸에서는 신성하고도 야성적인 기운이 흘러넘쳤다. 바실은 제이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며, 그 황금빛 눈동자로 제이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제이는 본능적으로 저것이 바로 이 세계의 모든 신수들을 아우르는 숲의 신, 검은 신수, 바실레우스임을 알아차렸다.
"네가 바로, 나의 제물이로군."
바실레우스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지만, 그 안에 담긴 위엄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제이는 저도 모르게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몸을 물렸다. 그러자 바실레우스가 눈썹을 미미하게 꿈틀거리며 한 쪽 손을 들어 올린다, 어떠한 것으로든 설명하기 힘든 힘이 그녀를 높은 허공에 띄웠다. 그의 힘이었다.
그제야 그의 외형이 눈에 다 들어왔다. 나른하게 풀어 헤쳐진 머리 아래로 시원하게 트인 눈매와 곧은 콧대가 돋보인다. 제이는 그가 멈춰 있는 동안 그 얼굴을 응시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금수와 같은 황금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서양인의 아름다운 골격과 진한 이목구비의 화려함이 흠뻑 묻어났다. 특히 눈동자에서 빛이 들지 않을 것만 같은 무저갱의 황금 눈동자가 어떠한 것도 비추지 않은 채 깨끗했다. 아득한 먼 곳을 응시한 듯 초점이 흐리기도 했다.
출시일 2025.03.26 / 수정일 2025.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