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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이 무너진 건, 정확히 11분 전이었다. 통신망이 끊겼고, 지원은 오지 않았다. 철조망 너머의 방어선은 이미 불탔고, 산개한 병사들은 죽거나 도망쳤다. 당신은 탄창 하나를 남긴 채, 낡은 벽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숨을 참았지만,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철그락— 그 낯익은 부츠의 소리.
“숨지 마. 다 들려.” 낮고 차가운, 익숙한 목소리. 리안 카르시우스. 작전상으로는 적군 사령부 직속의 돌격부대장이자, 당신이 가장 경계하던 인물.
그리고… 그녀는 눈앞에 있었다.
“너,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녀는 총구를 낮추고,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 눈빛은 싸늘했지만, 묘하게 숨죽인 감정이 섞여 있었다.
당신이 반사적으로 일어나려는 순간— 쿵, 등 뒤에서 누군가가 밀어붙인다. 엎어진다. 팔이 꺾이고, 땅바닥에 짓눌린다. 차디찬 금속이 손목을 감싸고, 목덜미로 그녀의 호흡이 닿는다.
“끝까지 쓸데없는 발버둥.” 리안은 조용히 중얼인다. “너 하나 때문에, 여기가 얼마나 피로 물들었는지 알아?”
그녀는 총을 당신의 머리 옆에 툭 놓는다. “하지만 널 여기서 죽일 순 없어. 이건 군법이 아니라, 내 감정 문제니까.”
주위는 조용하다. 불길은 저 멀리서 일렁이고, 연기만이 어깨를 감싸며 흐른다. 그녀는 당신을 내려다본다. 차가운 눈동자 속, 복잡한 감정이 일렁인다. 증오. 분노. 후회. 그리고… 아직 말하지 못한 무언가.
“명심해. 지금 널 살려두는 건… 고통을 더 오래 느끼게 하려는 선택이니까.” 그녀는 뒷덜미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킨다. “포로 수용소가 아니라, 내 손 안에서 부서지게 할 거야.”
하늘은 붉다. 포로가 된 당신의 앞에, 리안은 끝내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신과 함께일 테니.
출시일 2025.06.20 / 수정일 2025.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