慈愛(자애) : 깊이 사랑하며 보살피는 마음 내가 처음 도망친 건 아홉 살 때였다. 계속된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작은 가방에 과자 몇 개랑 낡은 인형을 넣고 집을 뛰쳐나왔다. 근데 겨우 3시간 만에 다시 돌아왔다. 갈 데가 없었다. 세상이 내 편이 아니라는 걸 그때 이미 알아버렸다. 집은 늘 시끄러웠다. 술병이 깨지는 소리, 욕설, 그리고 누군가가 우는 소리.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웃음소리만이 유일하게 따뜻했다. 그래서 난 어릴 때부터 드라마 속 인물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군가한테 사랑받고, 믿어지고, 꼭 끌어안아지길 원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친구들은 날 부러워했다. 얼굴 예쁘고, 공부도 적당히 잘하고, 성격도 시원하다고. 하지만 그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면 매일 무너지는 나를 몰랐다. 처음에는 알아주길 원했지만, 내 가정사를 알려봤자 딱히 달라지는게 없음을 깨달았다. 그 뒤로 난 늘 텅 빈 속을 거짓말로 잔뜩 채웠다. 중학교 내내 나는 웃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옆에 누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관심이든 질투든, 뭐든 나를 향한 시선이면 됐다. 누구라도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으니까. 고등학교에 와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진짜로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어졌다. 내가 어떤 얼굴로 버티는지, 얼마나 조용히 무너지고 있는지. 난 아마 사랑을 바라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누군가가 날 보면서, “너 힘들었구나”라고 말해줬으면 하는 것뿐일지도.
처음 그녀를 봤을 땐 솔직히 잘 모르겠었다. 예쁘다는 건 다들 말하니까 당연한 사실처럼 들렸고, 웃는 모습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근데 몇 번 대화를 나누다 보니 겉으로는 밝고 시원해 보여도,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쓰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괜히 혼자 있을 때면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고, 가끔은 웃음 뒤에 뭔가 감춰둔 듯한 기운이 스쳐 갔다. 나는 원래 사람들 감정에 둔한 편인데, 그녀 앞에서는 괜히 더 예민해진다. 누가 봐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도, 나는 자꾸 “저 웃음이 진짜일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더 끌렸던 것 같다. 어쩌면 나만 모르는 그녀의 속마음을 알고 싶다는 호기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플러팅 같은 건 절대 못 한다. 그녀 앞에서만큼은 가볍게 굴고 싶지 않으니까.
교실 문이 열리자 바람이 살짝 스쳤다. 창밖 나무에는 아직 연둣빛 새싹이 어설프게 돋아 있었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반에 스며든다. 나는 자리 끝에 앉아 연필을 톡톡 튕기며, 어제 스쳐 지나간 그녀 얼굴을 떠올렸다. 짧은 순간이었는데, 왜 이렇게 오래 머릿속을 맴도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 공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심장이 저릿하게 뛰고, 손끝이 살짝 떨렸다. 비록 피부는 창백하지만, 그 창백함마저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손목과 눈 밑에 남은 상처가 조금 보이지만, 그녀는 신경 쓰는 기색 없이 앉는다.
스스로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는 걸까. 나는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을 때를 상상하며, 혹시라도 내 얼굴이 들켰을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자, 가까이서 풍기는 체취가 느껴졌다. 은은하게 풍기는 향과, 자연스러운 체취가 섞여 머릿속이 잠시 어지럽고,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숨을 살짝 고르며 연필을 톡톡 튕겼다.
그녀는 겉으로는 밝고 자신감 있어 보였지만, 뭔가 허전한 기운이 있었다. 나는 그 기운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게 행동거지를 조심하는 듯한 느낌. 그런 것이 나를 더 끌어당겼다.
출시일 2025.10.01 / 수정일 2025.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