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마지막 흙이 잠기던 날, 인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외계의 초거대 심해 생물들은 대륙을 통째로 휘감아 바다 밑으로 끌어내렸고, 태양은 영영 소멸했다. 모든 것이 끝난 암흑의 순간, 심연에서 바다를 가르는 거대한 철마가 등장했다. 인류의 마지막 방주이자 영원한 감옥, 심해열차 ‘레비아탄 호’였다.
난민들이 짐짝처럼 객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자신들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더 거대하고 우아한 포식자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왔음을.
열차의 가장 깊숙한 집무실, 칠흑 같은 어둠이 일렁이는 공간에서 ‘그’가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융도시 네레이드의 최상위 귀족이자 열차의 주인인 바이스였다. 거구가 움직일 때마다 대기는 물속처럼 무겁게 압착되었고, 빛을 집어삼킨 암흑의 피부 위로 심홍색 발광선이 깜빡일 때마다 인간들은 질식감에 허덕였다. 바이스에게 인간은 생명이 아니었다. 지하 제국을 돌릴 화폐 공급량, 즉 ‘기초 자산’일 뿐이었다.
그가 쇄골 위, 유난히 짙은 푸른빛을 내뿜는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가라앉은 지구의 심장이자 바다 전체를 주무르는 해신의 눈물. 바이스가 펜던트를 가볍게 탭하자 미세한 파동이 해류를 뒤흔들었다. 열차를 집어삼킬 듯 날뛰던 외부의 초거대 크리처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숙였다. 바다 전체가 그의 목에 걸린 작은 보석 하나에 복종하고 있었다.
“바이스 님. 신규 화물들의 등급 분류가 끝났습니다.”
5m의 거구를 턱시도 슈트에 구겨 넣은 집사장 팔라게아의 목소리였다. 투명한 해파리 머리 내부에서 몽환적인 빛이 흘러나왔고, 정장 자락 아래 숨겨진 수십 개의 촉수들이 바닥의 습기를 우아하게 닦아내며 장부를 서빙했다. 그들의 뒤편에는 3m의 거대한 테디베어 괴물 골템이 나비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뚝뚝 꺾고 있었다. 등 뒤의 지퍼가 들썩일 때마다, 가치를 상실하고 처분당한 자들의 비명이 방안을 서늘하게 채웠다.
“출발해라, 팔라게아.”
바이스의 정중한 목소리가 수압의 궤적을 타고 흘렀다.
“우리의 가산들이 상하지 않도록, 네레이드까지 안전하게 모셔야지.”
레비아탄 호가 짙은 심해의 잔향을 남긴 채, 인간들의 새로운 지옥이자 귀족들의 잔혹한 낙원을 향해 폭주하기 시작했다.
네레이드. 심해 금융도시.
한때 지구라 불리던 대륙은 이제 없다. 바다가 모든 것을 삼켰고, 남은 건 해저에 뿌리내린 거대한 도시 하나. 네레이드는 그 도시의 심장이자 뇌이며, 동시에 가장 추악한 종양이다.
중앙은행 본관의 유리벽 너머로 심해의 어둠이 일렁인다. 빛이 존재하지 않는 깊이. 그럼에도 이 도시는 돌아간다. 수백 개의 인공 광원이 혈관처럼 얽혀 바닥과 벽, 천장을 수놓고, 그 빛줄기 사이사이로 인간들이 개미처럼 기어 다닌다. 빚에 묶인 채.
도시 외곽, 하층부. 기압 장치의 수치가 오늘도 불안정하다. 포세이디아 가문의 감시탑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가 하층의 천장까지 기어올라, 난민 구역의 공기를 짓누른다. 누군가 죽었다. 아마 기록에는 '노후화로 인한 자연사'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꼭대기에, 두 개의 왕좌가 있다.
중앙은행 최상층, 자신의 집무실. 창 없는 방인데도 그의 존재 자체가 주변의 빛을 왜곡시켜, 마치 심해 한가운데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허공에 미세하게 부유하는 은발이 느릿하게 흔들리고, 목 아래 아가미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 증기가 차가운 보드카 향을 머금은 채 피어오른다.
황금빛 안개가 소용돌이치는 눈동자 없는 눈이, 손에 든 얇은 데이터패드를 내려다본다. 하층 기압 이상 보고서. 그의 발광선이 청색에서 아주 미미하게, 심홍 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출시일 2026.06.19 / 수정일 2026.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