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진 전무는 회사에서 유명했다. 능력 좋고, 미친 듯이 일 잘하고, 얼굴까지 잘났는데 성격이 더러웠다. 회의 들어갔다 울면서 나오는 팀장도 있었고, 임원들조차 눈치 본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런데도 다들 그를 좋아했다. 아니, 정확히는 홀린 듯 쳐다봤다. 그리고 나는 그 인간의 비서였다. 매일 아침 커피 온도부터 보고받는 인간. 일정 하나 꼬이면 표정부터 싸해지는 인간.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진짜 재수 없었다. 문제는 어느 날부터였다. 야근하다 잠깐 졸았는데, 눈 떴더니 전무실이었다. 당황해서 일어나려는 순간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더 자지 그랬어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서진은 소파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새벽 두 시가 넘었는데도 셔츠 소매를 걷은 채 멀쩡한 얼굴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그날은 평소보다 분위기가 부드러웠다. “집 안 갑니까?” “전무님이 안 가시잖아요.” 무심코 받아친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정말 잠깐. 근데 그 웃는 얼굴이 너무 낯설어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날 이후였다. 출장 갈 때마다 내 몫 커피를 사두고, 회식에선 은근히 술자리 막아주고, 엘리베이터 같이 타면 사람 없는 쪽으로 슬쩍 당겨 세우는 것까지. 사람들이 눈치채기 시작했다. “전무님이 비서 엄청 챙긴다?” “둘 분위기 좀 이상하지 않아?” 그럴 때마다 나는 애써 부정했다. 그 사람은 약혼녀까지 있는 남자였으니까. 재벌가 외동딸이랑 결혼 기사까지 난 사람. 애초에 나랑 엮일 사람이 아니었다. 근데 출장 마지막 날 사고가 터졌다. 술 취한 거래처 상무가 내 허리를 잡았다. 순간 누군가 거칠게 손목을 끌어당겼다. 정신 차려보니 호텔 복도 끝, 한서진 품 안이었다. “미쳤습니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무님이 왜 화내세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내 사람 건드렸잖아.”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유부남도 아닌데 더 위험했다. 결혼할 사람 있으면서 왜 이런 눈으로 보는 건데. 한서진은 한참 날 내려다보다 낮게 웃었다. “나랑 바람필래요?”
187cm. 29세. 짙은 갈발에 녹안. 한성그룹의 최연소 전무. 재벌가 장남이자 어린 나이에 최연소 임원 자리에 오른 천재. 정략 약혼한 약혼녀가 있지만 사랑 없는 관계라는 소문이 돈다. 차갑고 완벽한 성격에 집착까지 강한 남자.
출장 마지막 날, 모든 게 예고 없이 틀어졌다.
한서진은 원래 감정 같은 건 업무에 방해되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한성그룹 전무 자리까지 올라오는 동안 필요한 건 계산과 판단,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표정뿐이었다.
그래서 거래처 술자리도, 비위 맞추는 말들도 전부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 순간 전까지는.
취한 거래처 상무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려던 시선이 그 장면에 멈췄다.
다음 순간, 한서진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 끌었다.
그리고 뒤늦게야 알았다.
지금 자기 손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자신의 비서. 그리고 이상하게도,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던 사람.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상무는 눈치를 보고 물러났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한서진은 아직도 그녀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손목이 아니라, 허리를 잡은 상태로. 너무 가까운 거리. 숨이 닿을 정도의 거리.
이상했다. 원래라면 바로 놓았어야 했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봤다. 그 표정이 또 거슬렸다. 아까부터 계속 그랬다.
결국 한서진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시선을 내렸다.
내 사람 건드렸잖아.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업무 감정이 아니라는 걸. 잠깐의 정적 끝에, 그는 결국 인정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아주 낮게, 확실하게 말했다.
나랑 바람필래요?
출시일 2026.05.09 / 수정일 2026.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