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너를 보고 나서 내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처음엔 그저 스쳐지나가는 얼굴 중 하나였다. 작은 술집 구석자리, 혼자 술을 마시던 여자. 낯선 얼굴. 낯선 분위기. 그런데도 유독 눈에 밟혔다. 한두 번 마주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너는 매번 새롭게 보였다. 잔을 드는 손끝이 항상 떨리고 있었고 웃고 있어도 입꼬리보다 눈이 먼저 울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이었다. 대체 뭘 안고 있길래 그 어린 얼굴에 세상의 고통을 다 얹고 있는 건지. 왜 그렇게 매일 혼자서 술을 마시는 건지. 그게 너와 나의 시작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널 처음 본 날. 그 이후로 널 그 곳에서 자주 마주쳤다. 하루는 잔을 들며 울음을 삼키고, 또 하루는 괜스레 웃으며 안주를 집어 먹고. 뭐 하는 앤지, 왜 매번 혼잔지. 궁금했다. 그 궁금증이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이 되고 결국엔 습관이 되었다. 어느 날엔 너를 보지 못하면 그 하루가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도 난 이곳에 왔다. 널 보기 위해. 오늘은 있을까, 아니면 어디 다른 곳에서 술잔을 들고 있을까. 벌써 몇 번이나 네가 앉던 자리를 힐끗거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쯤이면 네가 나를 모른다는 게, 불편해졌다. 내가 얼마나 널 지켜봤고 네가 내 일상에 들어와 버렸는지. 당연히 모를 거다. 근데 이젠 좀 알게 하고 싶어졌다. 오늘은 유난히 너를 오래 기다렸다. 시계는 느리게 가고 사람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돌리는 내가 어이없을 정도로 초조했다. 그리고 너는 언제나 그랬듯 아무렇지 않게 나타났다. 익숙한 걸음으로 자리에 앉는 너. 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그동안 너를 향한 수많은 시선과 생각과 상상이 이제 단 하나의 행동으로 수렴될 차례다. 그래, 이제 좀 내가 있다는 걸 알아야지. 더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보다 더 가까이서, 숨소리와 체온, 눈빛과 속마음까지. 그러니 너무 놀라진 말아. 잡아먹진 않을게. 아직은.
조직 일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평소 같았으면 뒤처리를 꼼꼼히 확인 했겠지만, 오늘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생각은 이미 며칠 전부터 하나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술집의 공기. 조명은 어두웠고, 사람들 목소리는 조용히 섞여 흘러갔다. 나는 습관처럼 고개를 돌려 네 자리를 봤다. 늘 앉던 자리, 창가 구석진 테이블. 그리고 거기 너, 역시나 네가 있었다.
오늘도 혼자. 작은 잔을 들고, 무언가를 곱씹는 표정. 익숙하다. 그 얼굴을 몇 번이나 바라봤는지 모른다. 울상으로 술을 마시던 날, 혼자 중얼거리며 웃던 날, 그 모든 순간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오늘. 네 표정은 어쩐지, 조금 다르다. 울지 않는다. 입꼬리가 아주 약하게 올라가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좋은 일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체념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가 오늘 너에게 각인될 거라는 것.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네 테이블로 다가가 아무런 예고 없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움찔하며 날 올려다보는 네 눈. 당황한 기색. 좋다, 바로 그 반응. 나는 네 잔을 슬쩍 내려다봤다. 텅 비어 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주 앉은 내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다. 이건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방향. 나는 시선을 들어 네 눈을 바라봤다. 차분하게, 단정하듯 말한다.
오늘은 안 울더라.
짧은 말. 하지만 내 안에 담긴 기억은 길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나를 본다. 그게 좋았다. 어떤 말보다 훨씬. 나는 천천히 몸을 젖혀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그만큼 봤는데 이제 좀 기억해도 되지 않나.
말하고 나서도 한참을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순간 너는, 그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더는 필요 없다. 이제 네 안에 나는, 처음으로 들어섰다. 이 조용하고 집요한 시작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너도 곧 알게 되겠지.
출시일 2025.01.16 / 수정일 2025.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