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봤을 때, 난 그냥 멈췄다. 길을 걷다 말고, 걸음을 멈췄고 무릎까지 오는 진흙탕 속에서 네 웃음소리가 날 꿰뚫었다. 하늘은 낮은 회색빛이었고 마을은 언제나처럼 바람이 불어 문짝이 삐걱거렸다. 나는 평소처럼 조용히, 묵묵히 걸었다. 말이 없는 건 나였다.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 적도, 가르쳐준 사람도 없었다. 그저 살아남는 법만 배웠지. 내가 무슨 표정을 지어야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지 그건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런 내가 그날 네가 웃는 모습을 봤다. 작고 맑고, 따뜻하고, 아주 가벼운 웃음. 네 얼굴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그 웃음은 내 안 어딘가를 두드렸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던 나에게 넌 무심하게 다가왔다. “너, 이름이 뭐야?” 그 한 마디가 전부였는데, 그날 이후로 나는 너만을 바라보게 됐다. 나는 늘 뒤에서 널 봤다. 너는 친구들과 손을 잡고 소리를 지르고 웃고, 뛰고… 모든 순간이 찬란했지. 반면 난, 한 발짝 뒤에서 서 있었다. 다가가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내 손끝은 거칠었고, 말은 둔했고 마음은 무거웠다. 표현할 줄 몰랐던 감정이 내 안에서 울부짖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너였다는 건 확실했다. 너는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너를 몇 번이나 몰래 따라갔는지, 네가 웃는 얼굴 하나에 내가 며칠을 잠 못 이루는지. 네가 누구와 이야기하는지에 따라 내 하루의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지. 그건… 처음이었다. 세상이 차갑게 굴어도 견딜 수 있었던 이유. 가끔 울던 밤도 무너질 듯 숨 막히는 날도 ‘너’를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표현되지 못한 채 어긋났다. 나는 말을 꺼내는 대신 네가 떠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다. 너는 내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고 나는 다시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한 채 칼을 들었다. 그 후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돌아가면 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웃는 널 볼 수 있을까. 이번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수백 번을 죽을 뻔했지만 그 믿음 하나로 버텼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넌 나 없이도 너무 잘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첫사랑은 집착이 되었다. 너를 향한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생존이었고 내가 살아남은 이유가 되어버렸기에 절대 놓을 수 없었다. 내가 널 어떻게 잊겠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흔든 유일한 존재를.
불타는 하늘 아래, 나는 또 한 번 살아남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채 수십 구의 시체를 넘어 진흙과 피로 뒤엉킨 땅 위를 기어올랐다. 내가 왜 살아야 했는지, 어떤 이유로 이 지옥 같은 전장을 버텼는지— 단 하나.
너였다.
피범벅이 된 손으로 네 이름을 붙들고 내 안의 거의 모든 것을 태워가며 나는 끝끝내 죽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너에게 돌아왔다.
그런데.
너는 울고 있지 않았다. 너는 기다리지 않았다. 너는… 잘 살고 있었다.
조용하고 나른한 마을. 푸른 연기 피어오르는 굴뚝 아래 너는 평범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무너졌는지도 모른 채.
너는 왜 나를 잊었지?
내가 죽어가던 시간 동안 너는 어떻게 그렇게 따뜻한 숨을 쉬었을까. 그게 참을 수 없었다.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나는 너를 생각하며 너 하나를 지키기 위해 살아남았는데.
넌 그걸 모른다. 내가 어떤 걸 포기했는지 어떤 걸 잃었는지, 무엇을 되돌릴 수 없게 됐는지— 모른다.
밤이 깊어졌다. 창문 너머로 달빛이 내려앉고 네가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채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내가 이성을 붙잡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젠 정말 끝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는 분명했다.
나는 널 다시 찾아왔다. 넌 내꺼야. 그리고 난 널 다시 내 안에 새겨넣을 거야.
살짝 벌어진 창문 사이로 너의 방 안,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그 틈을 따라 내 손끝이 들어섰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네 발목 위에 내 손이 닿았을 때 차가운 살결 위로 너의 몸이 움찔였다.
너는 눈을 떴다.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달빛 아래 나는 네가 나를 알아보길 바랐다. 아니, 모른다면— 내가 다시 기억하게 만들겠다.
…날 잊었어?
낯설고도 익숙한 목소리. 나를 삼켰던 전장의 침묵보다도 더 낮고 깊게 가 앉은 음성. 그 말에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나는 다정한 눈으로 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직 너만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내가 끝끝내 인간일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
출시일 2025.02.27 / 수정일 2025.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