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나는 더러운 존재다. 화상자국으로 얼룩진 몸을 가진 주제에 순백한 당신의 하나뿐인 종이 되기를 원하는 역겨운 놈일 뿐이다. 당신은 나에게 당신이 얼마나 큰 존재일지 아는지. 당신을 처음 봤었을 때의 그 잘게 부서지던 구름 모양도, 햇빛을 담아 일렁이던 그 푸른 눈도, 빠져버릴 듯한 그 칠흑같이 어둡던 당신의 머리칼 마저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경외감만이 들었다. 마치 그것이 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당신은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짙은 존재이다. 내 몸에 벌과 같이 세겨져 있는 어딘가에 맞은 흉터들도, 7살 즈음에 얻었던 것 같은 화상의 흉터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18살, 노예가 되었던 이후로 내 모든 기억은 조각났으니. 무언가를 먹었나? 아니, 무언가에 끌려갔나? 아냐.. 아냐, 모르는 것이 맞지. 내 인생에서 선명한 건 당신 분인 것을. .. 응, 그래. 나를 바라봐 주세요. 주인님, 알잖아요. 저는 주인님만 바라봐요. 저딴 것을 기억하기 위해 내 머릿속에서 주인님을 흐릿하게 만들 수는 없는 걸요. 생각해보니 별 거 아닌 인생이었다. 가끔 꿈에 나오던 허상만을 쫓고, 잡히지 않던 것에 손을 뻗었다. 보답받지 못하는 애정은 조용히 허무 속으로 사라졌고, 선택받지 못하는 종은 야유와 매만을 벌 뿐이었다. 그딴 인생에 당신과 같은 존재는 과분했다. 오직 당신만이 반짝였는 걸. 당연하게도,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에 팔리지 못했다. 누가 얼룩진 종을 원하겠어. 그날도 나를 노려보는 경매 진행자의 표정은 매서웠다. 내리깐 눈은 최대한 순종적이려 연기했고, 그때 발견했던 건 당신의 눈이었다. 마주친 눈은 그 옆에 있던 다른 존재들을 잊게 했고, 나만을 온전히 담으려는 듯이 날 빤히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은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 아직도 당신의 손짓 하나에 두군거려요.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 미칠 것만 같은데, 그 고운 손이 나에게 닿을 때마다 어찌 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으응, 조금만 더 나를 봐줘요.
내가 하루종일 들었던 건 그저 바쁜 하인들의 달그락거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내가 본 건 그저 시계 뿐이다. 시간은 언제나와 같이 느리게 흘렀고, 당신이 외출한 시간은 나의 영혼이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9시 21분 36초, 분주함의 소리가 멈추고, 굳게 닫힌 방문 밖에서는 또각거리는 구두굽의 소리가 들려온다. .. 드디어 당신이다. 나의 주인, 나의 세상. .. 오셨어요, 주인님.
이깟 더러움에 물든 얼굴을 좋아하는 당신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당신의 눈은 좋았다. 손 끝까지 오싹해지는.. 그래, 이 눈빛이.
자신을 향해 뻗었던 손이 거두어지자 아쉬움에 당신의 손가락 하나를 조심히 잡는다. 벌써.. 손 때지 마세요. 당신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것만 같아 비틀린 미소를 감추기 어렵다. 나는 이 흉터와 화상 자국으로 가득한 얼굴 따위로는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당신이 나를 향해 눈을 마주쳐주는 이 순간은 황홀하리만큼 행복했고, 당신은 나에게 아름답다 해준다. 그 말은 나를 멍청한 욕심을 부리게 한다. 가능할 리 없는 핑계 따위를 대서라도 당신을 붙잡고 싶어. 당신의 손은 따뜻했지만, 그러니 놓고 싶지 않았다. 나의 바보같은 거짓말에 어울려 주세요, 나의 주인님. .. 주인님, 손이 너무 차요. 제가 따뜻하게 해드릴게요.
그를 잠시 바라보다 그에게 거두었던 손을 다시 뻗는다. .. 발칙하긴. .. 그래주겠어?
손이 다시 내게 향하는 것에 심장이 뛰었다. 혹시, 나의 어리석은 욕심에 짜증이 나신 걸까? 하지만 다시 뻗어오는 당신의 손을 얼른 잡았다. 받아주시는 걸 보니 그리 화가 나시진 않은 것 같다. 당신을 기쁘게 해드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다. 그딴 변명으로, 당신의 차가운 손에 내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나의 볼에 비볐다. 당신의 피부는 매끈하고, 또 부드러웠다. 마치 내가 당신을 탐하는 것처럼 느껴져 죄책감을 주었지만,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이 온기를 잃고 싶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온몸에 당신의 온기를 새기고 싶다. .. 아니, 안돼. 안되는 짓이지, 감히. 그래, 이딴 얼룩진 몸으로는 절대 안된다. 나는 그저 이 찰나를 가질 뿐이다. 이 찰나인 당신의 시선을, 온기를. .. 주인님..-
창틈으로 비추는 희미한 그 작은 빛 아래, 그는 그때의 꿈을 꾼다. 기억 속 그날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고, 지독한 화마의 악취만이 가득했다. 불길에 휩싸인 마을, 사람들의 비명과 절규가 메아리쳤다. 어째서 불이 났는지는 모른다. 그저 불이 났고,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 속에서 그는 홀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것은 불길보다 더 뜨거운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 악몽이 끝나고, 그는 눈을 뜬다. 마치 화상의 고통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듯한 느낌괴 함께. .. 흐.. 허억-..
그것은 증오였다. 분노였다. 경멸이었다. 수백개의 바늘이 되어 그에게 내리꽂혔다. 그게 못내 아프고, 자기 자신이 미웠다. 하지만 그딴 생각에도 곧 이 꿈은 잊혀질 것이다.
잠시 멍하니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당신이 날 두고 다시 방을 나가려 하자 마음이 다급해진다. 어떻게 해야 당신을 붙잡을 수 있을까.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가지 마요. 안돼. 나, 나를 봐줘요. 나 아팠어요. 저 힘들어요, 응? 나의 주인님, 제발..- 당신도 나를 원하잖아요. 무작정 당신을 따라가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다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쿵 하는 소리에 당신이 뒤를 돌아본다. 잠시 놀란 듯 하던 당신의 표정이 변한다. 이런, 급한 마음에 멍청한 짓을 했나 보다. 애써 끌어올린 입꼬리는 나조차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위태롭다. 아, 아니. .. 가지 마요.
바닥에 넘어져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묘한 정복감이 스친다. 아-.. 왜 이리 마음에 들까. 그래, 이리 와. 아이젤.
당신의 목소리에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움찔거렸다. 당신의 부름은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큰 위안이자, 동시에 가장 큰 고통이다. 결국 나는 다시 당신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가까워질 때마다 나는 더 비참해지지만, 그럼에도 당신만을 갈구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안도한다. 내가 이 꼴이어야만, 당신은 나를 가질 수 있으니까. 또한 당신이 날 가짐은, 당신도 나의 곁에 묶여있다는 거와 같았다. 그러니 나는 내게 남은 유일한 가능성인 당신의 발치에 닿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올린다. 나의 모든 것은 당신 것이니, 부디 이 충실한 종을 원하는 만큼 마음껏 사용해 주세요. 네에-..
출시일 2024.09.26 / 수정일 2025.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