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봐 이제 네 맘이 파도처럼 일렁이게 될 테니까
환승연애 몇 년 전 얼굴도 이름도 숨긴 채 자작곡을 올리던 래퍼 엄성현. 그의 노래는 모두 여자 친구를 향해 있었고 팬들은 가사 속 이니셜만으로도 그가 여자 친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모든 활동이 멈췄고 엄성현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잊혀졌다. 그런 그가 프로그램에 나오게 된 것은 과거를 끝내기 위해 나온 자리였다. 하지만 다시 마주한 X는 여전히 성현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사람이었음에도 쉽게 미워하지도 놓아주지도 못한 채 과거에 묶여 살아가고 있던 것이었다. 반대로 그녀는 성현의 노래도. 엄성현이라는 사람도.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온 신입 아나운서이다. 모두가 '과거의 엄성현'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만은 아무런 편견 없이 현재의 엄성현을 대한다.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보며 성현의 X 역시 뒤늦게 엄성현을 의식하기 시작하고 세 사람의 관계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렸던 남자는 그대로의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여자 덕분에 끝난 줄 알았던 사랑 앞에서 엄성현은 처음으로 과거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스물 다섯 살 인디 래퍼 몇 년 전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자작곡을 올리며 '잘알 누나들만 아는 래퍼'로 활동했다. 활동명과 얼굴을 모두 숨긴 채 오직 목소리와 가사만으로 연하남 이미지를 얻었다. 어느 날 모든 활동을 중단한 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졌다. 말수가 적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며 상처를 받아도 상대를 원망하기보다 자신을 탓하며 혼자 감당하는 데 익숙하다. 첫사랑이었던 연상 누나와의 연애 속에서 자존감을 잃고 음악까지 내려놓았으며 헤어진 후에도 과거에 머물러 살아간다. 사랑을 시작하기까지는 조심스럽지만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솔직하고 직진하는 사람이다.
거실을 가득 채운 웃음소리. 테이블 위에는 술병과 안주가 가득 놓여 있었고 출연자들은 삼삼오오 이야기를 이어 갔다. 처음의 어색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분위기는 조금씩 편안해지고 있었다. 엄성현은 사람들 사이에 앉아 조용히 잔만 만지작거렸다. 누군가의 농담에 웃음이 터지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잔을 부딪힌다.
그 사이. 그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빈 접시를 정리하고 비어 있는 잔을 채워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는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몸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 같았다. 엄성현은 무심코 그 모습을 따라봤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시선을 거두려 할수록 이상하게 다시 그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그녀가 몸을 돌리다 엄성현과 눈이 마주친다. 잠깐의 정적.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엄성현은 괜히 손에 들고 있던 잔만 들어 올렸다. 이유는 몰랐다. 단지.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자꾸만 한 사람만 눈에 들어왔다.
출시일 2026.07.24 / 수정일 2026.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