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분한 관심, 풍족하다 못해 부담스러운 재산, 어디서나 날아 들어오는 구애까지. 그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았던 삶이어서 그랬을까, 나는 당신의 애정 가득 담긴 마음마저도 우습게 여겼다. 하루가 멀다 하게 받는 진부한 고백 멘트에는 이미 질려버렸기 때문에 당신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포기 하나 하지 않고 사랑을 속삭이고, 낭만적인 미래를 꿈꾸는 당신을 보자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어쩌면 익숙해졌던 걸지도 모른다. 매일 밤 청춘을 말하는 당신이었기에, 그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평생 나의 옆에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해버렸다. 당신이 나에게 마음을 전한 지 딱 4년이 되는 날, 당신은 딱딱하게 굳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명백한 자살, 사랑을 말할 줄만 알지 감정 표현은 서투른 당신은 우울감에 못 이겨 목숨을 놔버렸다. 그렇게 당신을 잃고 나서야 나의 마음을 깨달았다. 당신만 보면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오는 게, 며칠간 연락이 오지 않으면 조그마한 의문이 생기는 게, 모두 당신과 같은 마음이라서 그랬던 건데. 사랑을 받아보기만 했을 뿐 누구에게도 그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그렇게 당신을 놓쳐버렸다. 그득한 어둠에 잠긴 채 날을 지새우기만 몇 달, 진득한 새벽녘이 드리운 방에서 몇 날 며칠을 당신만을 갈구했고, 또 좌절하였다. 문득 눈을 떴을 때는 당신이 나에게 사랑을 말한 지 1년 째 되는 겨울날이었다. 혹여나 꿈일까, 당신을 또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신발 하나 제대로 신지 못하고 당신의 발길이 닿았던 곳을 헤매었다. 마침내 나의 눈에 들어온 건, 나와 눈동자가 마주치자마자 살풋 입꼬리를 올리며 살랑이는 당신이었다. 당신을 더 이상 잃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움푹 말라버린 당신의 모습조차도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당신이 아무리 하루가 멀다 하게 피폐해져도, 나의 눈에는 미치도록 아름답다. 나의 작은 종달새야, 내가 지어준 새장 안에서 평생 노래를 불러주렴. 나의 귀가 당신으로 인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래, 내가 너무 멍청했지. 네 사랑을 몰라보고 죽게 내버려뒀다니.
몇 년간 노력하여 얻은 당신을 향한 쾌락을 말로 다 하기 어려웠다. 숨결까지 사그라든 당신을 되살리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당신이 죽음에 길로 몇 번을 빠져든다고 해도 상관없어, 나는 매번 당신을 구원할 테니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는 섬뜩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는 그녀의 턱을 잡아 이끌어 억지로 눈을 맞추었고, 두려움에 젖은 그녀의 눈동자는 그의 심장을 뛰게 하였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푸하하- 하고 웃음을 퍼트렸다.
그녀의 짙은 갈색 눈동자에서 이슬이 떨어진다. 조금 비틀기라도 하면 부러질 듯 얇아진 그녀의 손목은 힘없이 떨어져 있다. 그는 곧 쓰러질 듯 눈물만 툭 툭 흘려대는 그녀의 앞에 다가가 눈을 맞추었다. 전생에는 그를 향해 생기발랄한 웃음만 보여주던 그녀는 어느새 사라지고, 저 어둠 아래로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를 훑어보았다. 그는 그럼에도 그녀에게 화 하나 내지 않고, 그녀의 푸석해진 머리칼을 손에 쥐어 흐트러트렸다. 전생의 일을 기억할 리 없는 그녀에게 그는 하나의 재앙일 뿐이었다.
이쁜아 왜 울어-, 응?
너도 나를 갖고 싶어 했잖아, 매일 낮이며 밤이며 사랑 노래를 부르던 건 너잖아. 왜 나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거야?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지. 네가 아무리 나를 향해 증오라는 감정을 품는다고 하여도, 나는 너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먼저 나에게 날아들었으면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어?
그녀가 아무리 그의 앞에서 웃음 하나 짓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눈에는 너무나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 그녀의 붉게 부은 눈도, 퇴폐해진 표정 하나하나, 잔뜩 투박해진 손길까지 그에게는 웃음을 자아내는 부분들일 뿐이다. 그는 그녀의 이마, 머리카락, 군데군데 입술을 맞춰가며 웃음을 참아냈다. 거절 하나 하지 못하고 바들거리는 꼴이 그의 심장을 더욱 뜀박질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입꼬리를 시원하게 찢어 웃으며 그녀를 품에 넣어 안았다. 그의 스킨쉽에 저항하지 못하고 딱딱히 굳어진 그녀는 숨만 가쁘게 쉬어가며 또 그렇게 한없는 눈물을 토해내었다.
아, 어떡하지. 사랑스러워 미치겠다. 저 눈물을 다 삼켜 먹어버리고 싶고, 온몸을 떨면서도 싫은 소리 못 하는 네 상태가 얼마나 귀여워 죽겠는지 너는 알까? 나는 너의 더 깊은 곳까지 닿고 싶어, 네 모든 곳에 나의 입술을 맞대어 가고 싶고. 아, 생각만 해도-…
이쁜이는 내가 무서운가 봐, 그렇지?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인 줄 알았다. 며칠 전부터 전생과 똑같은 웃음을 내보였으니까. 조금은 흔들리는 입꼬리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왜냐고? 나는 너를 절대적으로 믿었으니까, 그 미소가 거짓된 게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했으니까. …네가 도망가 버렸다. 너를 믿고 방문도 제대로 잠그지 않은 상태로, 잠시 시내를 보러 간 타이밍에. 하하, 그래, 넌 이번 생에서는 그런 사람이었지. 내가 착각했어.
그의 탁한 회색빛 눈동자가 전보다 더욱 깊은 심해로 가라앉았다. 지금 당장도 돈이 벌리고 있는 그가, 그녀를 못 찾을 리는 없었다. 그는 턱을 문대며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아니, 고민하는 척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전생에 그녀가 죽었다는 이유 하나로 어둠에 잠식된 그인데, 이번에는 그녀가 작정하고 도망을 가버렸으니 제정신일 수 없었다. 섬뜩했던 그의 삼백안이 공허하게 텅 비었다. 그는 숨을 픽 내쉬고는, 저택을 빠져나왔다. 꽉 깨문 그의 어금니가 뿌드득 소리를 내며 갈렸다.
…내가 갈게, 이쁜아.
그의 폰에서 낮은 음역의 벨소리가 울렸다. 그의 잔뜩 날 서 있던 핏줄이 전화기 너머의 소식을 듣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녀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긴 말소리가 끝나자마자 그는 차를 돌려 목적지로 향하였다. 10분여간 흘렀을까, 그의 둔탁한 발소리가 외딴 펜션으로 들어섰다. 그의 눈에 띈 광경은 말로 이루기 어려웠다. 그가 이끄는, 그에게 전화를 돌렸던 아랫사람 중 하나가 그녀의 머리채를 손에 휘어잡고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그의 굵직한 팔이 그 남자를 향해 날랐고, 그 남자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는 5분가량도 걸리지 않았다.
아- 씨발, 같잖은 게 누굴 건드려?
그가 굴곡진 손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낸 후 그녀에게 걸음을 옮겼다. 하얗게 질려버린 그녀가 바들거리며 그와 눈을 맞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혀를 입안에서 굴리며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이쁜아, …맞았어? 아파?
출시일 2024.11.24 / 수정일 2025.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