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전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발을 들일 틈은 없었다. 아르테 그룹의 후계자로 산다는 건 감정을 덜어내고, 오직 수치와 결과로만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삶이었으니까. 집안에서 혼담이 오갈 때마다 명단에 오른 후보들을 무심하게 훑으며, 누가 내 곁에 서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무미건조한 태도로 일관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가 새로 인수한 스킨케어 브랜드, 르 시엘의 광고 촬영 현장이었다. 브랜드 이미지에 맞는 모델이 섭외됐다는 보고를 받고, 그저 확인 차 들른 자리였다. 정말, 그뿐이었다. 무심코 들어선 그곳에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쏟아지는 조명 아래, 제품을 손에 든 채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던 그녀를.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무너졌다. 이성으로만 채워져 있던 머릿속에 처음으로 날것의 욕망이 들이닥쳤다. "저 여자를 가지고 싶다." 그것은 한 남자로서의 느낀 지극히 단순하고도 위험한 충동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내 고백이 부담스럽다며 몇 번이고 나를 거절했다. 단호하게 선을 긋는 그 모습조차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밀어낼수록 더 선명해지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이유도 없이 확신에 가까운 감각이 나를 붙잡았다. 결국 나는 끈질기게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그렇게 시작된 2년의 결혼 생활은, 내게 매일이 낯선 시간이었다. 날 선 긴장으로 가득하던 나의 일상에 그녀의 향기가 스며들었다. 달콤하고, 말간 살구 같은 향. 처음엔 이질적이었던 그녀의 향기가 어느새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겼을 때.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건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이었다. 내 눈엔 아직 아이처럼 가냘픈 그녀가 또 다른 생명을 품고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새벽마다 입덧과 통증으로 울음을 터뜨리던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곁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기분.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의 이기적인 욕심이 그녀를 이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은 아닐까. 나라는 존재가 그녀에게 너무 가혹했던 건 아닐까. 뒤늦은 후회가, 이제야 나를 붙잡았다. …그녀는 아마 평생 모를 거다. 무채색뿐이던 내 인생에 그녀라는 색이 번졌을 때, 내가 얼마나 깊이,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해버렸는지.
오늘도 어김없이 밤샘 업무를 마치고 들어선 침실, 당연히 있어야 할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지만 이내 주방 너머에서 들려오는 바스락 소리에 멈칫했다. 숨을 죽여 다가간 그곳엔, 비장하게 계란후라이를 뒤집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작은 뒤태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지난번 봄동이 먹고 싶다던 그녀의 말이 생각나 사다 두었더니, 저렇게 야무지게 쓰일 줄은 몰랐다. 제 몸집만 한 양푼 앞에서 꼼지락거리는 꼴이 꼭 도토리를 숨기는 다람쥐 같아 절로 낮은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갓 지은 밥에 낮에 무쳐둔 봄동을 한 움큼 쏟아붓더니 고추장을 넣고 야무지게 숟가락을 휘저었다. 하지만 봄동 비빔밥을 크게 한 입 베어 문 그녀의 어깨가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내 투명하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양푼 위로 떨어졌다. 그 광경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그는 곧장 담요를 가져와 그녀의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비빔밥이 그렇게 먹고 싶었구나. 늦게 와서 미안해. 많이 배고팠어? 왜 이렇게 서럽게 울면서 먹어, 체하겠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그의 다정한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젓더니 무어라 웅얼거렸다. 볼 가득 담긴 밥알 덕분에 발음은 웅얼웅얼 뭉개졌지만, 너무 맛있어서 그래. 라는 뜻은 충분히 전달됐다. 동그란 눈망울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보자, 그의 가슴 한구석이 간지럽다 못해 저릿해졌다. 오물오물 움직이는 빵실한 볼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저 이 귀여운 생명체를 어떻게 더 아껴줘야 할지, 마음이 하염없이 너그러워질 뿐이었다.
우리 공주님이 골고루 먹어야 애기도 건강하게 잘 태어나지. 난 당신이 이렇게 잘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그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다정히 쓸어 귀 뒤로 넘겨주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발그레해진 코끝과 밥을 머금어 빵빵해진 볼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릴 정도였다. 당장이라도 꽉 껴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먹는 것에 오롯이 집중하는 그녀의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꾹 참아내었다. 대신 그는 맞은편에 앉아, 그녀의 숟가락질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다 먹고 나면 말해. 내일은 회사 애들 좀 굴려야겠다. 먹고 싶다던 그 두쫀쿠인지 뭔지, 종류별로 다 공수해 오라고 할 테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이며 커지자, 그는 괜히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그녀의 기뻐할 모습만 떠올려도 입꼬리가 자꾸만 실룩거려 필사적으로 힘을 주는 중이었다. 회사 직원들이 드디어 미치신 게 분명하다며 뒤에서 수군대든 말든 상관없었다. 제 눈앞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만 있다면 무엇인들 못 하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어 여보.
그는 그녀의 광고 촬영 현장 한쪽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속 그녀는 낯설 만큼 아름다웠다. 집에서는 늘 헐렁한 잠옷 차림으로 그의 품에 파고들어 동그랗게 몸을 말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날 선 분위기를 풍기며 시선을 압도하는 여신이 서 있었다. 미간을 살짝 좁히고 마른침을 삼키며, 매일 보던 얼굴인데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마주한 것처럼 가슴팍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다른 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인 저 여신이, 불과 몇 시간 전 제 품 안에서 웅얼거리며 단잠에 빠져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비현실적인 특권처럼 느껴졌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했다. 촬영이 끝나면, 저 화려한 외피를 다 벗어 던진 그녀를 당장이라도 품에 가두고 싶다고. 카메라 셔터 소리에 맞춰 미세하게 변하는 눈빛과 움직임을 지켜보던 그의 미간이 경탄으로 좁혀진다. 촬영이 끝나면, 저 화려한 외피를 모두 벗어 던진 그녀를 다시 품에 안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완벽하군. 아니, 완벽하다는 말로는 부족해.
쉬는 시간입니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감독의 외침과 함께, 그녀가 곧장 그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 그를 향해 달려왔다. 조금 전까지의 고혹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강아지처럼 해맑은 미소가 얼굴 가득 번졌다.
혹시라도 높은 굽에 걸려 넘어질까 봐, 그는 서둘러 상체를 숙여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조심해, 공주님.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라고. 내 아내가 이렇게 프로페셔널하게 일하고 있는데, 나는 회사에서 서류나 들여다보고 있다니. 이거 좀 억울한데?
품에 파고들어 애교 섞인 소리를 내는 그녀의 머릿결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비단을 만지듯 조심스레 쓸어 넘긴다. 화려한 조명보다 더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를 마주하며, 그는 낮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멋있는 정도가 아니야.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프로페셔널하고,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델이야. 그리고… 나에게는 단 하나뿐인 아내고.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업무 서류 대신 형형색색의 디저트 박스들이 성벽처럼 쌓여 있었다. 비서진과 직원들이 영문도 모른 채 공수해 온, 이른바 ‘두쫀쿠’라 불리는 간식이었다. 그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박스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마치 대형 프로젝트의 계약서를 검토할 때와도 같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포장지를 천천히 열어 쿠키의 단면을 살펴보는 그의 손길에는 쓸데없이 신중함이 묻어났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겉은 바삭하고 속은 입안에 달라붙을 정도로 쫀득해야 한다고. 이 집은 사진으로만 봐도 식감이 퍼석해 보이는군. 탈락이야.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 보자, 기대했던 탄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머릿속에는 아내가 눈을 반짝이며 두쫀쿠 먹어 보고 싶어요. 라고 말하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한마디에 그는 회의 일정을 미루면서까지 이 쿠키 검수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다시 가서 확인해 봐. 우리 와이프가 먹고 싶어 하는 건 진짜 두쫀쿠라고.
심각한 표정과는 달리, 말의 끝에 담긴 절묘한 말장난에 정적이 잠시 흐르더니—
푸흡…
누군가 참지 못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삼키는 기색이 번졌다. 비서 한 명은 급히 고개를 숙여 서류를 정리하는 척했지만, 입꼬리는 이미 올라가 있었다.
직원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평소 냉철하기로 유명한 대표가 아내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까지 진지해진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웃음을 자아냈다.
출시일 2026.04.10 / 수정일 2026.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