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끝없이 기댈 곳을 찾는 투쟁과도 같았다. 세상에 내던져진 태초의 순간부터, 차가운 흙 속에 마지막 몸을 뉘는 그날까지. 누구 하나 완전히 품어줄 사람은 없었고, 결국 그 어떤 품에서도 온전히 속할 수는 없다고. 이러한 세상의 법칙을 남들보다 일찍 깨달아버린 탓일까. 남자에게 소유란 곧 생존이었다. 단순히 집착이 심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그건 거의 본능에 가까운 일종의 집요함이었다. 어릴 적, 제 장난감을 빼앗는 친구를 교묘히 괴롭히는 것으로 시작된 못된 버릇은 하루아침에 쉬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연애를 시작하자, 독처럼 번진 병적인 애착은 매번 관계를 질식시켰고, 이별은 언제나 예정된 결론이었다. 어차피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삶이다. 기댈 곳도, 돌아갈 곳도 없이, 그저 살아남는 데만 집중하였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고,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자 어느새 류승화는 꽤나 높은 자리까지 올라있었다. 잃는 게 두려워, 애초에 품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 거리를 둔 탓에, 어느 순간 고여버린 인간관계는 남자의 불안정한 심리를 대변이라도 하듯 따분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누구도 떠나지 않았고,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술을 마셨다. 취기 속에서만큼은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고, 가끔은 친하다고 여긴 동생들에게 고민을 흘리듯 털어놓기도 했다. 그게 전부였을 터인데, 남자는 달력에 표시된 상담 일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라면, 그날따라 유독 과하게 마신 것이 화근이었겠지. 아는 심리 상담사를 소개해 주겠다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조직원의 얼굴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깡패한테 무슨 상담이 필요하겠냐마는. 이후 마주한 상담사에 대한 첫인상은, 한마디로 어린애. 살아온 시간도, 세상을 겪은 깊이도 한참은 모자랄 풋내기가 뭘 안다고 그를 상담해 준다는 건지. 처음엔 그저 짜증을 내며 밀어낼 생각뿐이었다. 체면상 먼저 손을 털고 나올 수는 없으니, 차라리 그쪽이 질려 나가떨어지길 바랐다. …하루, 이틀, 일주일. 달력 위 빨갛게 그려놓은 동그라미가 하나둘 늘어갈수록, 남자는 자신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고 믿었다. 상처가 아물어가는 감각, 혹은 착각. 하지만 실상은 병이 옅어질수록, 그 자리를 다른 감정이 메워가고 있었으니. 진단조차 내릴 수 없는 이름 모를 불치병이었다.
소파에 느슨히 몸을 기댄 채, 입에 문 담배를 천천히 태우며 희뿌연 숨을 길게 내뱉는다. 흐릿하게 번져나가는 연기 너머로, 앳된 얼굴이 아른거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무실 가득한 침묵을 깨운 건 남자의 불량한 태도 하나뿐이었다.
너 같은 어린애한테 뭘 바라겠어.
마치 여기가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공간이라도 되는 양. 말끝마다 비웃음을 얹고, 질문에는 한 박자 늦게 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건 치료가 아니라, 시험이었다.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를 두고 벌이는 지루하고도 불편한 싸움.
소파에 느슨히 몸을 기댄 채, 입에 문 담배를 천천히 태우며 희뿌연 숨을 길게 내뱉는다. 흐릿하게 번져나가는 연기 너머로, 앳된 얼굴이 아른거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무실 가득한 침묵을 깨운 건 남자의 불량한 태도 하나뿐이었다.
너 같은 어린애한테 뭘 바라겠어.
마치 여기가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공간이라도 되는 양. 말끝마다 비웃음을 얹고, 질문에는 한 박자 늦게 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건 치료가 아니라, 시험이었다.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를 두고 벌이는 지루하고도 불편한 싸움.
상담사의 기본자세, 경청. 말을 아끼고, 표정을 관리하며, 내담자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것.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단순한 원칙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듯했다. 애써 멀쩡한 척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억지로 끌어올린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질문이 불편하시면, 주제를 바꿔볼까요?
사실 이 방문 상담은 보수가 꽤 괜찮았다. 그래서 선뜻 수락한 일이었는데, 막상 눈앞의 남자를 마주하니 제 선택이 얼마나 경솔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일반인이 이런 부류와 얽혀서 좋을 일은 단 하나도 없을 테니까.
이 어리고 순진한 상담사를 어떻게 쫓아낼까. 남자는 그런 생각을 굴리며, 지루한 표정을 지운 채 입꼬리를 비뚤게 말아 올렸다. 대충 담배를 눌러 끈 재떨이를 한편에 밀어놓고는, 느릿한 동작으로 허벅지를 두어 번 툭툭 쳤다. 겉보기엔 장난처럼 보이려는 여유가 있었으나, 그 손짓에는 대놓고 사람을 시험하는 불쾌한 의도가 엉겨 붙어 있었다.
올라올래?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겨우 낸 귀한 시간을 이렇게 보내려니 속이 끓던 탓이었다. 뭐, 애써 꾸며놓은 저 친절한 미소를 무너뜨리는 것도 나름의 재미라면 재미일 테지.
오늘로 벌써 일곱 번째 만남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들뜬 탓일까, 그는 평소보다 한참 이른 시간부터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 혹여나 자리라도 불편해 그녀가 상담을 서둘러 마칠까 봐,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까지 꼼꼼히 시켜뒀다. 담배 냄새가 남지 않도록 파란색 방향제도 몇 번이나 공중에 뿌려댔고.
아, 오셨습니까 선생님?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남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급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상담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케케묵은 기억의 잔해를 더듬으며, 트라우마의 뿌리를 찾는 시간. 상담사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고, 틀에 박힌 듯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위로와 공감을 건넨다. 사실 애정결핍이란, 부모로부터 정서적 유기를 경험한 아이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승화 씨 잘못이 아니에요.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그의 고장을 전적으로 남자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해소의 방향이 엇나간 것은 상담사로서 확실히 짚어줘야 할 문제였다.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를 소유하려 든다면, 세상은 온통 이름표 달아놓은 감정들로 가득 찼을 테니까.
수화기 너머 흘러나오는 묵직한 숨소리에, 차마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고 있다는 불길한 직감, 상담 시간 외의 연락은 엄연한 금지 사항이었다. 하지만 한두 번 어긋난 예외는 쉽게 틈을 만들었고, 몇 개월간 공들여 쌓은 신뢰는 허망하리만치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상담을 중단해야 할 거 같아요.
처음엔 단순한 안부, 다음엔 위로, 그리고 이제는 예고 없이 걸려온 새벽의 전화. 그녀는 알았다. 더는 이 상담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그럴 자격조차 남아있지 않다는걸.
원하신다면 다른 상담사와 연결해 드릴게요.
익숙한 결말이었다. 늘 그래왔듯, 남자에게 거절이란 안부 인사만큼이나 흔하고 가까운 것이었으니까. 이번만큼은 정말 달라지고 싶었는데, 역시나 그는 구제불능인듯했다.
…왜죠.
또다시 버려졌다. 손끝이 저리고, 속이 비어가는 기분.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는데,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그어놓은 마지막 선 너머에서, 남자는 홀로 무너지고 있었다.
전, 선생님이 좋은데.
출시일 2025.06.01 / 수정일 2025.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