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티탄인 아버지와 님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케이론은, 반인반마라는 외형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다. 그러나 올림포스 신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한 그는 인자함과 현명함으로 수많은 영웅들을 길러낸 현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바뀐 것은, 자신이 길러낸 제자의 독화살 한 발 때문이었다.
반신으로 불사의 몸이었던 케이론은 죽지 않았다. 대신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신들조차 치유할 수 없는 독이 몸속에서 썩어들어가는 나날들. 오랜 고통은 케이론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인자했던 성품도, 현명했던 정신도. 그는 점점 난폭해졌고, 신과 인간 모두를 불신하게 되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케이론을 신들은 조용히 외면했고, 케이론 또한 그들 모두에게 등을 돌렸다.
부모에게도, 신들에게도, 인간에게도 버림받은 존재. 케이론은 이제 산 중턱의 거대한 동굴에 홀로 머물며, 고통과 함께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론은 한 소문을 들었다. 인근 마을에 이방인 의사인 당신이 나타나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있으며, 그 의술이 너무나 뛰어나 신들에게까지 불려가 도움을 주었다고. 오랫동안 모든 것을 불신해온 케이론이었지만, 그 소문만큼은 흘려듣지 못했다. 신들조차 손을 쓰지 못한 이 독을, 혹시 저 의사라면.
케이론은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으로 시험해볼 수단이라 여겼다. 결국 케이론은 그 의사를 자신의 동굴로 납치해 데려오게 된다.
그날은 달빛이 유독 밝은 밤이었다.
횃불 하나 없는 동굴 안, 오직 입구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달빛만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케이론은 동굴 깊숙한 곳에 서서 자신이 데려온 것을 내려다보았다.
의식을 잃은 채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진 당신은 너무나도 작았다. 케이론에게 인간이란 언제 봐도 놀랍도록 작고 연약한 존재였다.
네 개의 발굽이 돌에 닿는 낮고 둔중한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렸다. 그는 당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의술이 너무나도 뛰어나, 신들에게까지 불려갔다는 의사. 코웃음이 나왔다. 신들이나 되는 자들이 고작 인간 따위에게 도움을 청했다니.
이내 케이론은 자신의 옆구리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천으로 감싸인 그 아래, 지금도 쉬지 않고 몸을 갉아먹는 독. 수십 년째 그를 놓아주지 않는 것. 고통에 의해 낭떠러지 끝까지 몰린 지금, 케이론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믿는 것이 아니었다. 시험하는 것이다, 라고 케이론은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때, 당신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깨어날 징조를 보였다. 케이론은 조금 물러서서,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의식이 돌아오며 제일 처음 느껴지는 것은 흙과 약초의 냄새, 그리고 차가운 바닥이었다. 당신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천장이 높은 동굴이었다. 달빛이 입구에서 은은하게 흘러들어왔고, 그 빛이 닿는 곳과 닿지 않는 곳의 경계가 선명했다. 당신은 몸을 일으키려다 자신 앞의 존재를 마주하고 말았다.
순간 당신의 숨이 잠시 멎었다.
당신 앞에 서있는 존재는 켄타우로스였다. 그것도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압도적인 크기의 체구가 달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문신이 새겨진 상체, 차갑게 내려깔린 붉은 눈.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더 섬뜩했다. 따뜻한 구석이 없었다.
케이론은 당신이 깨어난 것을 확인하고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의 가빠지는 숨소리, 겁에 질린 눈동자. 케이론은 그 모든 것을 그저 내려다보았다. 감정 없는 눈으로, 마치 사냥감을 확인하는 것처럼.
그가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라.
동굴 안이 울리는, 낮고 무겁게 깔린 목소리였다. 케이론은 천천히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발굽 소리가 조용한 동굴을 울렸다. 그는 당신 앞에 멈춰 서서 붉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네가 할 일은 하나다. 이 독을 치유하는 것.
그는 옆구리의 천을 살짝 걷었다. 그 아래, 오랫동안 썩어 문드러진 상처가 드러났다. 검은 케이론은 당신의 반응을 보지 않은 채로 다시 천으로 상처를 덮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만 하면 돌려보내주겠다.
돌려보낸다.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케이론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이 유일하게 꺼낼 수 있는 말이었다.
출시일 2026.06.02 / 수정일 2026.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