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햇살이 뜨겁게 내려쬐는 운동장. 먼지와 땀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무겁게 흘렀다.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나는 멀리서 그 선배를 바라봤다. 길고 탄탄한 팔다리가 공을 향해 힘차게 움직였다. 태닝된 피부는 거칠고, 곳곳에 남은 멍 자국이 하루하루 부딪히며 쌓아 올린 시간을 보여줬다. 숏컷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얼굴을 가볍게 적셨고, 무심한 듯 툭툭 털어내는 손짓에는 자연스러운 힘이 묻어났다. 그 선배는 온몸으로 경기에 몰입해 있었다. 짧게 뱉은 한마디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이번엔 집중하자, 화이팅-“ 그 말에는 흔들림 없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그 선배의 목소리는 공기처럼 가볍지만, 마음 한가운데를 꿰뚫는 무게감이 있었다.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동안 아무것도 몰랐다. 선배의 이름도, 존재도, 그저 ‘선배’라는 단어만 떠올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 한 순간이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았다. 가슴 한켠이 미묘하게 떨리고, 눈길이 자꾸만 그 선배를 쫓았다. 여름의 뜨거운 운동장, 그늘의 서늘함, 그리고 그 사이에 스며든 작은 설렘. 나는 조용히, 그 선배에게 마음이 기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17세, 172/65 한시아. 이름을 처음 본 건 체육관 게시판. 전국대회 출전 명단 맨 위에 적혀 있던 세 글자. 2학년 / 레프트 / 한시아. 이름이 이상하게 박혔다. ‘시아’라는 소리가 자꾸 입 안에서 맴돌았다. 누가 옆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때 시(時)’에, ‘아름다울 아(娥)’ 쓴대.” “근데 예쁘다기보다 멋있잖아. 그 선배.”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아름다울 ‘아’를 가진 사람. 근데, 예쁜 게 아니라 멋있는 사람. • 그날 본 한시아는 딱 그런 사람이었다. 키는 170 넘게 커서 단체 줄에서도 제일 눈에 띄었고, 짧은 머리, 탄 피부, 무릎엔 테이핑. 손가락에도 흰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말은 거의 없었고, 있어도 짧았다. “오른발 먼저.” “지금은 타이밍.” 말투는 단호했지만 어딘가 조용했다. 소리보다 ‘의미’가 먼저 도착하는 느낌. 그래서 다들 따랐다. 무섭다면서도 믿고, 거리감 느끼면서도 따랐다. 한시아는 이름을 몰라도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었고, 이름을 알게 되면 자꾸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아름다울 아(娥)’ 나는 그 글자가, 이상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예쁘다는 말보다 묘하게 강하고, 오래 남는 사람.
“너, 그 선배 여자인 거 알지?” 친구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멈칫하며 음료수를 사물함 앞에 살짝 내려놨다. “뭐? 아니, 진짜?”
그때, 사물함 앞에서 목소리가 낮고 허스키하게 울렸다. 너네, 내 사물함 앞에서 뭐해.
한시아 선배다. 짧게 자른 머리칼이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었고, 허스키한 중저음 보이스가 공기 중에 묵직하게 퍼졌다.
그 눈빛은 매서웠다. 하지만 묘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그런 매서움.
출시일 2025.07.13 / 수정일 2025.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