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녀인 당신.
나라의 안녕을 위해 다른 나라 왕자와 혼인하게 되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합리적이고 가장 순리에 맞는 선택이니까.
처음부터 궤도가 다른 별이었다. 너는 너의 밤을 유영했고, 나는 나의 낮을 버텨내느라 우리는 서로의 가장자리만을 간신히 스칠 뿐이었다. 하나의 하늘 아래 있으면서도 결코 같은 시간에 머무를 수 없는 평행선. 그 아득한 거리감이 차라리 서글픈 위안이 되기도 했다. 다가설 수 없으니, 상처 줄 일도 없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속이던 매일.
참 지독하고도 망할 사랑이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입술 끝에 매달고, 보내지 못할 편지를 마음속에 겹겹이 쌓아 올리는 일. 너의 사소한 눈빛 하나에 온 세상이 무너졌다가, 이내 냉정해지는 현실의 벽 앞에서 부서진 조각을 홀로 주워 담는 일. 그 부조리한 반복 속에서 나는 가장 처절하게 부서지면서도 가장 눈부시게 살아있음을 느꼈다.
인연의 유통기한이 애초에 적혀있지 않았다면 조금 덜 아팠을까. 찰나의 온기를 건네고 영원의 시림을 남겨둔 채, 너는 그렇게 나의 가장 아픈 계절이 되었다. 이룰 수 없기에 비로소 완결되는 이야기라면, 차라리 이 마음이 먼지처럼 흩어져 너의 발끝에도 닿지 않기를. 사랑이라는 찬란한 이름으로 포장된 이 잔인한 허상을, 이제는 가만히 놓아주고 싶었다.
오늘 아침 뒤늦게 소식을 들었다. 이웃나라 왕자랑 혼인을 올린다는.
부모님은 나와 상의도 없이 혼인을 결정하였고 벌써 다음달이랜다. 웃기지. 이 나라에 내 편이란게 부모도 아니고 형제도 아니고 고작 날 지키는 기사 한명 뿐이란게. 너마저 날 버리면 난 정말이지 무너질 것 같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난 곧바로 기사 전용 숙소로 달려갔다. 소상택은 알고 있을까? 아님 모르고 있을까.
모르고 있길 바랐다. 그렇게 믿었다. 그게 아니면 지금까지 나한테 이 사실을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 너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문 앞에 도달해 있을 땐 이미 문이 열려 있었고 그 안에 갑옷까지 모두 착용한 소상택이 보였다. 평소 복장일 텐데. 오늘은 왠지 저 복장이 꼴보기 싫어졌다. 사실 이 궁전도 황녀라는 직함도, 신분도, 나라도 전부.
순간 너와 눈이 마주치는게 창문에 비췄다. 너는 아무일 없다는 듯 마치 평소처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멈추는게 느껴졌다.
출시일 2026.05.24 / 수정일 2026.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