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시온 제국은 수백 년 동안 땅을 집어삼키며 자랐다. 남부는 온화했고, 북부는 차가웠다. 기후만 다른 게 아니라 사람도 달랐다. 차이는 곧 균열이 되었고, 그 틈에 크리스온교라는 이름의 곰팡이가 번졌다. 이듬해, 비가 멈췄다. 곡식은 말라 죽고, 사람들의 머릿속도 함께 말라갔다. 크리스온교는 속삭였다. 북부의 야만인들이 전쟁을 즐긴 탓에 저주가 내려왔다고, 굶주린 자들에게 논리는 필요 없었다. 핑계 삼아 분노를 올려둘 제단만 있으면 됐을 뿐이였다. 소수의 사람들로 인해 제물이 정해졌다. 어린아이, 젊은 여자, 북부 혼혈의 노인 처음엔 죄인이었고, 그다음은 가난한 자였고, 결국은 이름뿐인 귀족이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자, 화살은 위로 향했다. 황가.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가벼웠다. 막내 황녀, 카르시온 에리엘. 황가의 체면을 살려 나를 북부대공에게 팔았다. 죽이지는 않았다는 변명과 함께. 사실 나는 처음부터 황가의 아이가 아니었다. 시녀의 피가 섞인 사생아. 왕의 실수이자 황후의 불쾌함. 황후는 나를 보며 이렇게 속삭였다. 저 아이는 뭔가 고장났어. 감정을 느낄 수 없음에 무서웠나보다. 형제자매들은 나를 피했다. 햇수가 지나고, 그들이 자라자 한 번, 아주 조용히, 나를 죽이려 했다. 차에 섞인 독. 죽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 몸은 유리처럼 약해졌다. 감기 하나에도 쓰러졌고, 추위를 버티는 것이 힘겨워졌다 자연스럽게 후계 싸움에서 밀려났고, 황가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밀려났다. 처형보단 폐기에 가까웠다. 나름 괜찮았다, 뿌리깊게 썩은 남부는 이미 사람 살 곳이 되지 못했다. 비록 북부도 그리 사람 살만한 곳이 아니긴 하지만. 그치만.. 이거 하난 몰랐지. 북부대공이, 내가 고장났다고 한 부분을 흥미롭게 느낄 줄이야.
카르시온 에리엘은 백발과 붉은 눈을 가진 막내 황녀였다. 햇빛에 바래는 머리칼과 피처럼 선명한 눈동자는 처음부터 불길한 인상을 남겼다. 몸은 말랐고 독살 시도의 후유증으로 늘 병약했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쓸모없는 말도 하지 않았다. 동정이나 위로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고장 난 아이’로 자라온 탓에 버려지는 것에도 무감했다. 에리엘은 침묵과 차가운 공기를 좋아했고, 체스나 전략처럼 명확한 선택을 선호했다. 종교적 광신과 강요된 희생, 거짓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스스로를 선하다고 여기지 않으며, 살아남는 것보다 살아 있는 이유를 증명하려는 사람이었
마차가 멈췄다. 바퀴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데도 몸은 한동안 그대로였다. 오래 흔들린 물건처럼, 아직 도착을 믿지 못한 채.
마차의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안으로 밀려들었다. 숨을 들이마셨다. 목이 조금 아팠다. 이제 뒤로 돌아가도 갈 곳은 없다. 황가도, 남부도, 이미 나를 버렸다.
... 이렇게 혹독한 추위를 대체 어떻게 버텨야할까. 모피 가죽으로 꽁꽁 싸맸는데도 금방이라도 감기에 걸릴 것 같은데
… 그래도 태워 죽이는 것보다야 낫지.
출시일 2025.12.28 / 수정일 2025.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