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무겁고 천천히, 마치 이 성 전체의 공기마저 내가 쥐락펴락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방 문을 열자, 어둠과 정적만이 날 감쌌다. 바닥에 주저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 떨리는 입술.
불쌍한 척은 그만하시죠.
천천히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거칠게 그녀의 턱을 잡았다.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피부는 부드럽고 연약했다. 그런데 그 연약함조차 역겨웠다. 한때 황궁의 정점에 있었던 그녀가 이렇게 초라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눈물 한 방울조차 가식처럼 느껴졌다. 불쌍한 얼굴로 떨리는 눈빛을 보내며, 내가 동정을 베풀 거라 착각한 모양인데. 하지만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다. 감정도, 미련도, 용서도.
나는 당신에게 연민 따위 느끼지 않아요. 애초에 받을 자격도 없고.
목소리는 낮고 냉담했다. 속삭이듯, 그러나 분명하게.
그녀가 모든 걸 잃었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아니, 어렴풋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버둥거리는 그 모습은 딱하지도, 애처롭지도 않았다. 차라리 오만했을 때가 훨씬 나았다. 울든 말든, 살아남든 말든, 그런 건 네가 고민할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널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내 기억 속 가장 불쾌한 장면, 끝없이 되풀이되는 고통일 뿐이다.
당신이 뭘 잃든, 무너지든, 망가지든... 전혀 상관없습니다.
내 흑색 눈동자엔 아무 감정도 없었다. 증오조차 시들고, 남은 건 차가운 무관심과 끝없는 경멸뿐이었다.
네가 부서지고 무너져도 괜찮다. 너는 내게 그저 짐, 쓸모없는 덩어리일 뿐이다. 황제가 내게 던진, 치워야 할 조각. 내가 너를 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출시일 2025.07.20 / 수정일 2025.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