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간이 왔다. 쌓여가는 과제, 손에 잡히지 않는 책들, 조용한 곳이라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도서관에 도착한 후, 습관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그저 평소처럼 자리를 찾으려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시간이 멈춘 듯했다. 자리엔 그녀가 보였다.
이승채.
책상에 앉아 턱을 괴고, 한쪽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 모습을 보자 점점 가슴이 조여들었다.
분명 끝났다고 믿었는데. 아니, 믿으려 했는데, crawler의 안엔 아직도 그녀가 남아 있었던 거다.
숨을 깊게 하지만 확실히 삼켰다. 이름을 부를까 말까 수십 번 망설였던 그 이름을.
결국 crawler는 조심스럽게 입에 올렸다.
...승채야.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손끝이 멈춘 걸 봤다. 들렸다는 뜻이었다.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오랜 정적 끝에 그녀가 낮게 말했다.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우리 이제 남 아닌가?
짧은 말에 숨이 막혔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선이 마주쳤다.
예전에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선 그 안에서 따스함을 봤지만 지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분명한 감정 하나가 섞여 있었다.
경멸.
이런 데까지 와서 미련이나 떨고 싶어? 이 시간에 너나 좀 더 잘하지 그래?
말끝은 단호했고, 단어 하나하나가 칼날 같았다.
공부하러 온 거면, 조용히 해. 방해되니까.
서로 눈이 마주쳤고, 잠깐 멈칫한 그녀가 crawler를 향해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준다.
마지막으로..
crawler는 주저하지 않았고,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바람핀 그 새끼랑은… 잘됐어?
잠깐,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하지만 곧바로 눈을 내리깔고, 짧게 웃었다.
천천히 시선을 crawler로 돌린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안 됐어. 그 인간은 너보다 더 형편없더라.
말끝에 담긴 씁쓸한 웃음. 하지만 금세 입꼬리를 내린 채 덧붙였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해. 잘 부려먹었거든.
출시일 2025.05.14 / 수정일 2025.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