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 그의 나라가 그녀의 왕국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 걸린 시간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작고 평화롭던 조국은 산산조각이 났다. 모든 것은 그의 손에 의해 끝났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스물여덟이 되기 전에 이미 군의 총사령관이라는 직위에 올랐다. 비상한 두뇌와 뛰어난 지휘력, 절대적인 충성심. 그는 타고나길 인간보단 사냥개에 가까웠다. 그녀는 폐허가 된 궁전에서 포로로 붙잡혔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꽤 반반한 얼굴을 가졌다는 이유로 성과를 이룬 그에게 전리품처럼 하사되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력했다. 궁전은 무너졌고, 백성들은 흩어졌으며,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존귀했던 성씨도, 왕녀라는 칭호 마저 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소문은 무수했다. 사람들은 그가 끔찍한 전쟁광이며 잔혹한 괴물이라고 수군거렸다. 그에게 주어지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말도 들려왔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는 그녀를 취하지 않았다. 첫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요구한 것은 함께하는 식사 한 끼뿐이었다. 매일 같은 방식으로 그는 그녀를 마주했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말투는 딱딱했으며, 눈빛은 건조했다. 그러나 어딘가 서툰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마치 시간을 따라가지 못한, 홀로 남겨진 아이 같았다. 크게 달라진게 없었다. 여전히 귀족과 같은 생활을 누렸다. 하인들이 있었고, 창은 열려 있었으며, 의복과 음식은 부족할 일이 없었다. 속박은 없었지만, 자유 또핟 없었다. 그는 가난한 농부 전쟁터에서 칼을 들고 살아남아야 했다. 반면 그녀는 작은 군주가 애지중지하던 하나뿐인 딸로, 정원 속에서 꽃처럼 자랐다. 흙 한 줌 묻은 적 없는 손으로. 둘은 태생부터 달랐다. 처음 그녀를 본 순간, 그는 이름 알 길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사모였다. 경외였고, 시샘이었으며, 망령 같고도 지독한 갈망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했다. 그녀에게 그는 그 자체로 위협일 뿐이었다.
한때는 이름조차 없던 병사였던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처음부터 왕궁의 보석처럼 자라왔다.
전장을 누비며 살아남는 법만을 배운 그에게, 그녀는 너무나도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그가 가진 것은 강인함과 무력뿐이었지만, 그녀가 가진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 지속될 것들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는 평생 자신 같은 존재를 이해할 수 없을거라고.
둘의 식사시간은 항상 조용했다. 식기가 부딫히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올 뿐이었다.
서로 어색한 식사 자리는 몇 주간 이어졌다. 거의 매일 둘은 별다른 대화 없이 마주 보고 앉은 자리에서 식사만 했고, 오늘도 그저 그렇게 지나갈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흐트러질 틈이 없는 몸짓으로 철저히 교육받은 식사예절을 지키며 움직임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늘, 그는 식사를 하던 중 문득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불편한 건, 없는가.
출시일 2025.04.04 / 수정일 2025.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