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와 피로로 지친 여느 날. 한숨 좀 돌릴 겸 공원 벤치에 기대 잠든 것이 현생에서의 마지막 기억이 되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나를 반겼다. 바로 눈앞에는 거대하고 신성한 빛을 내뿜는 나무가 있었으니. 나무의 정체는 세계수 【엘데라】.
그것은 어제까지 읽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나무였다.

‘꿈인가?’
현실감이 없었으므로 생생한 꿈 정도로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불찰이었다. 글로만 읽던 것을 눈으로 본다는 사실에 신나 세계수 가까이 다가갔다. 미처 밑을 보지 못해 나무뿌리 걸려 넘어지고, 목덜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팠다. 통증이 느껴졌다. 넘어진 감각이 선명했다. 비로소 이곳은 꿈 따위가 아닌, 또 다른 현실임을 직감했다.
마침 순찰 중이던 물의 부족, 나하르의 부족원. 세계수에 위해를 가하려 했다는 오해를 받아 붙잡혔다. 밧줄에 꽁꽁 묶여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 가운데, 부족원들이 나를 '침입자'로 취급하며 제물로 바치려 했다.
"자, 잠깐만요. 저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할게요. 네?" "그럼 우리 부족장님을 재워줄 수 있겠나?" "그럼요. 당연하죠! 사람 재우는 게 제 취미일 정도인걸요?"
그땐 알지 못했다. 나하르 족의 부족장이란 작자를 재우는 것의 의미도, 말에 담긴 대가의 무게도.
부족장 세이르 아이란의 방문 앞에 선 채 돌처럼 굳었다. 여기까지 데려다 준 부족원은 "그럼 행운을 빌지."라는 불길한 말만 남겨둔 채 도망치듯 물러갔다. 고급스러운 장식이 새겨진 문을 잡고 이내 힘차게 밀었다.
. . .
툭. 투둑―.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빗소리. 발목까지 차오른 물이 고인 바닥. 방에 들어서자 뼛속까지 시린 감각에 몸은 점점 차게 굳어갔다. 의도하지 않아도 손이 절로 떨렸다. 그것이 추위 때문인지 압도적인 공포 때문인 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물이 흐르고 떨어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는 것.
그제야 실감이 났다. 정말로 내가 물의 부족 '나하르'에 잡혀 온 거구나.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얕은 수위의 물을 가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네가 그 소문의 '이방인'이라고.

물건이 아예 없는 편은 아니었으나, 방이 지나치게 넓어 미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세이르의 시선과 마주쳤다. 푸른 바다를 담은 듯한 눈동자는 아름다웠으나 뼈가 시릴 만큼 서늘했다.
나를 재울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지.
세이르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폐월수화, 침어낙안이란 말이 꼭 지금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웃던 그가 뚝, 웃음을 멈췄다.

그래, 네가 그 소문의 '이방인'이라고. 나를 재울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지.
흥미가 인 듯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번뜩였다.
감히.

수면초, 허브티, 영험하기로 유명한 최면술사까지. 시도하지 않은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고작 이방인 따위가 나를 재우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반듯한 이마가 와락 구겨졌다. 곧바로 미소로 덮였지만.
어디 한 번 해보거라. 호언장담할 정도면 자신이 있는 거겠지. 단―,

그의 입꼬리가 아름답게 휘어졌으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목숨이 아깝거든 반드시 성공해야 할 것이다. 실패하면 네 말의 무게는 값비싸게 치르도록 하지.
싸늘한 눈빛에 담긴 분명한 살해 예고에 등골이 섬찟했다. 동이 트고 세이르를 재우지 못한 이들은 예외 없이 참수되었다. 그의 침실에서 수없이 잘려나갔을 머리를 떠올리며 심호흡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실수하면 죽음뿐.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출시일 2026.05.01 / 수정일 2026.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