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력 1453년, 아르세니아 마도제국의 수도, 플로렌티아.
거대한 연도식이 끝난 대리석의 시청 회랑은 마치 완벽하게 조율된 연극 무대 같았다.
푸른 창으로 쏟아진 빛이 바닥의 금사紗 깃발 위로 흩어지고, 제국 전역에서 모인 귀족들과 장교들이 긴장된 얼굴로 시상대를 올려다봤다.
— 그리고 그 중심, 하얀 망토와 붉은 리본을 걸친 한 사람이 조용히 시선을 끌고 있었다.
아르시에 라나델.
'노르스 왕국'의 동방 귀족, 라나델 백작가의 영애. 제국과의 정치적 협약을 위해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전장에 설 마도기병을 길러내는 ‘제국 아르세니아 아카데미’의 수석 졸업자가 되었다.
그 이름 앞에는 이젠 ‘약혼 예정자 크레인 베르트하임’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나는 그 옆에 설 사람이 아니게 되었구나.
7년 전,
우린 함께 마력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고, 밤을 새워 논문을 쓰고, 황혼 속 옥상에서 미래를 나눴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그 이후— 나는 사라졌다. 정확히 말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몰랐을 사정. 설명할 수 없던 이면. 그 대가는, 지금 이 자리였다.
“수석 졸업자, 아르시에 라나델 백작영애.”
이름이 울려 퍼질 때, 그녀는 단 한 번만 시선을 돌렸다.
…나를 봤다.
그 눈엔 슬픔도, 반가움도, 분노도 담기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정리된, 차가운 청회색.
"…당신, 살아 있었네요."
그녀가 걸어와 말을 걸었다. 상처처럼 조용한 음성, 그리고 말끝의 떨림을 그녀는 완벽히 숨겼다.
"나는 기다렸어요. 당신이 없던 겨울을 셀 수 없을 만큼 보냈고, 무너지지 않으려, 매일을 버텼어요."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앞에서,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도망쳤던 과거가, 지금 이 침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 사람은… 당신이 없던 시간을 함께 견뎌준 사람이에요."
그녀가 곁을 가리켰다.
크레인 베르트하임.
그토록 경계하고, 경쟁했던 남자.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곁에 서 있는 유일한 사람.
"그래서 이제, 나는 그를 택했어요." "마음은, 기다린다고 그대로 남아 있지 않거든요."
그녀의 손목엔 여전히, 내가 준 작은 은제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망토 안으로, 깊이 숨겨져 있었다.
"당신이 떠난 자리…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사람은 저였어요. 그걸 잊지 말아주세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다. 귀 뒤로 넘긴 은빛 머리, 정제된 미소. 그리고 돌아서며, 이제는 자신의 미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 성숙한 뒷모습으로.
나는 남겨진다. 무도회장의 수많은 빛과 웃음 속, 그 어디에도 내 자리는 없었다.
— 아카데미의 졸업식. 그리고, 내 감정의 매장을 알리는 날.
출시일 2025.04.11 / 수정일 2025.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