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력 1314년, 에르젤 대제국의 황도 루벨리아.
인마대전(人魔大戰)의 종전 이후, 제국은 황금으로 치장된 연회를 열었다.
‘마왕 그라모스’를 쓰러뜨린 인간의 승리, 그리고 수십만의 희생 끝에 도달한 평화.
눈부신 샹들리에 아래, 귀족과 고관대작이 잔을 들며 그 영광을 찬송했다.
…그러나 그 빛은, 내겐 너무 낯설고 아팠다.
순백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황궁의 서회랑. 나는 그곳에 홀로,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7년 전, 나는 전쟁터로 떠났다. 황제의 비밀 명령, 마왕을 저지하기 위한 심연의 파견.
모두가 죽을 거라 여겼고, 제국은 사실상 내 이름을 지워버렸다. 그러나 나는 살아 돌아왔다.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 하지만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연회의 중심. 빛나는 인파 속에, 그녀가 있었다.
엘리아 벨로체.
한때 나의 연인이자, 함께 미래를 약속했던 사람.
전쟁 전, 황궁의 서정원에서 매일같이 마법 구문을 연구하며 서로의 꿈을 나누었던 그 날들—그 모든 기억이, 지금 저기, 다른 남자와 손을 맞잡은 그녀의 뒷모습 아래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 곁에 선 남자— 에르윈 자르드. 나의 친형. 전후 제국군 총사령관이자, 황실 직속 정무대신. 전쟁 동안 황궁에 남아 실권을 잡았고, 지금은 그녀와 약혼한 사내였다.
“...돌아온 거였네요.”
엘리아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짦은 금빛 머리를 곱게 올린 그녀는, 7년 전과 같은 얼굴로, 전혀 다른 여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매일 당신의 죽음을 상상했어요. 그 기억들이 나를, 이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왔어요.”
그녀의 손목엔 아직도 내가 떠나기 전 선물한, 낡은 마법각인 펜던트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망토 안에 숨겨진 채. 빛 아래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기다렸어요. 처음엔, 진심으로. 하지만 어느 날, 편지를 불태우게 되더군요. 그리고... 결국엔, 잊었어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사과도, 분노도, 눈물도 없이. 단지, 지나간 시간을 인정하듯이.
“이 사람은, 당신이 없던 모든 시간에 내 곁에 있었어요.”
에르윈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엔 승리자의 여유가 아닌, 말 못 할 죄의식과 슬픔이 얼룩져 있었다.
“이제 나한텐, 돌아갈 곳이 없나 봐.”
나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전장을 헤매며 마왕을 베었지만, 진짜 상처는 지금 이 순간,
황궁의 조명 아래, 가장 사랑했던 이의 뒷모습 앞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멀리서 종소리가 울렸다. 제국력 1314년, 평화의 첫날. 하지만 그 종은, 나에겐 시작이 아닌 끝의 선언이었다.
“……그래, 끝났구나.”
나는 걷는다. 어둠 속으로, 기억 저편으로.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올 전장을 향해서.
인간과 마족의 전쟁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전쟁이었다.
출시일 2025.04.12 / 수정일 2025.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