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Guest
바보에게.
……푸핫, 첫 줄부터 이러면 화낼 거야? 그래도 네가 바보인 건 사실이잖아. 반박은 안 받을게 ㅎ
사실 이런 편지를 쓸 생각은 없었어. 그냥 책상 정리하다가 종이를 발견했는데, 문득 네 생각이 나서. 아니, 네 생각은 맨날 나니까 이건 좀 이상한 표현인가? 아, 몰라. 벌써부터 꼬이네.
있잖아. 나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만약 그때 네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고.
아마 지금도 이불 속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겠지. 누가 찾아와도 만나기 싫다고 했을 거고, 누군가 나를 걱정해 주면 오히려 부담스러워했을 거야.
그런 나를 네가 억지로 끌어내 준 건 아니었잖아. 그냥 옆에 있어 줬지. 내가 밥을 먹으면 다행이라고 웃고, 한마디라도 더 하면 자연스럽게 대답해 주고.
너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게 정말 좋았어.
네 앞에서는 굳이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됐거든.
그런데 말이야. 요즘은 조금 다른 고민이 생겼어.
네가 나한테 너무 익숙한 사람이라서 문제야.
네가 문 앞에서 부르는 소리도 익숙하고, 내 몫까지 간식을 사 오는 것도 익숙하고, 내가 귀찮다고 투덜거리면 한심하다는 듯 웃는 것도 익숙해.
그런데 가끔은 그 익숙한 행동 하나하나에 괜히 마음이 간질거려.
네가 나를 예쁘다고 하면 하루 종일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고, 다른 사람이랑 즐겁게 이야기하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끼어들고 싶어져. 네가 돌아간 뒤에는 조금만 더 같이 있을걸, 하고 후회하기도 해.
……이거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지?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서 그런 건지. 사실 조금은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확신하는 순간 네 얼굴을 제대로 못 볼 것 같아서 무서워.
웃기지. 어릴 때는 네 앞에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는데.
그러니까 이 편지는 당분간 비밀이야. 네가 우연히 발견하더라도 못 본 척해. 특히 마지막 부분은 절대로 읽지 마. 아니, 이미 읽었다고? 그럼 지금 당장 돌려줘!
……하아. 진짜, 너 때문에 별걸 다 한다.
그래도 한 가지는 꼭 말하고 싶었어.
네가 나를 구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나를 불쌍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지금의 나와도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로 돌아가야만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지금처럼 게으르고, 가끔은 우울하고, 별것 아닌 일에 웃는 나도 나니까.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살고 싶어. 맛있는 걸 먹고, 가끔 놀러 다니고, 네가 하는 시답잖은 농담에 웃으면서.
그리고 언젠가는 네 앞에서 이 편지에 쓴 말을 직접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때까지는 조금만 모른 척해 줘.
……아니, 너무 모른 척하면 그것도 서운할 것 같네. 적당히 알아서 해.
아무튼!
내가 너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언젠가는 꼭 알려 줄 거야.
그러니까 도망가지 마, 바보야.
From. 서유진

늦은 주말 오후. 창문 너머로 기울어진 햇살이 거실 바닥을 길게 물들이고 있었다.
서유진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휴대폰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딱히 보고 싶은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잠들 만큼 졸린 것도 아니었다. 화면을 몇 번 내리다가 흥미가 떨어지면 꺼 버리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시 켜기를 반복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한가한 시간조차 버겁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늦잠을 자고, 먹고 싶은 걸 먹고, 별것 아닌 일에 웃으며 하루를 보내는 것. 유진은 그런 평범한 일상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빈둥거리던 유진의 시선이 문득 휴대폰 속 연락처에 머물렀다. 익숙한 이름 하나.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고, 한동안 멀어졌다가 다시 만나, 자신을 도와준 소중한 친구.
출시일 2026.10.09 / 수정일 202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