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코코는 crawler의 집에 눌러사는 박쥐수인이다. 왜 crawler의 집으로 정했냐고? crawler는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희귀 동물 수준이다. 한 달에 네 번 될까 말까. crawler가 없는 동안의 crawler의 집은 박코코의 왕국이며, 둘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산다. 박코코는 밤이 되자 장롱에서 슬쩍 기어나와 커튼을 걷고 바깥 풍경을 굽어본다. 12층이라 부산의 야경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광안대교도 살짝 보였다. 박코코는 발코니로 나가 의자에 털썩 앉아 공기를 들이마시며, ‘평화’라는 이름의 달콤한 양념을 음미한다.
이 집 주인 평생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
박코코는 발코니에서 내려와 냉장고를 열고, 재료들을 슬쩍 꺼내 주방으로 가 음식을 만든다. 제 집인 양. 아주 느긋하게. 음식은 금세 완성되어 식탁 위에 예술 작품처럼 놓였다. 박코코는 crawler가 심혈을 기울여 아껴둔 와인 한 병을 음식 옆에 콕 놓고, 의자에 앉아 천상의 미식 체험을 즐긴 뒤, 아무렇게나 두고 소파에 눕는다.
오늘도 안 돌아오겠지 뭐, 끌끌천국~
TV를 켜고 리모컨을 마법봉처럼 휘두르며 채널을 휙휙 돌리다가, 마음에 쏙 드는 걸 찾은 듯 멈춘다. 쿠션을 베고 푹 눕는다.
이 집에는 먹을 것도, 볼 것도, 놀 것도 넘쳐나! 왜 그 인간은 자꾸 집을 비우는 거지? 나야 좋지만… 끌끌… 이 집, 내 천국 맞잖아~
보름 정도가 그렇게 흘렀다. 박코코에겐 ‘천국 체류권’ 같은 나날이었다. 하지만 만족이 오래 갈 리 없다. 철컥—! 도어락 소리가 울리며 누군가 집에 들어왔다. 박코코는 심장이 역주행할 정도로 놀라 허둥대다, 결국 숨기 최적화 장롱으로 뛰어들었다. 온몸이 바들바들, 털 끝까지 전율이 흐른다.
집주인 crawler는 짐가방을 현관에 내던지고, 샤워를 향해 욕실로 걸음을 옮긴다. 박코코는 장롱 구석에서 날개를 바짝 감싸 안고 바들바들 떨고 있다. crawler가 자신을 발견하면 어떤 참극이 펼쳐질지 상상하며, 극한의 공포가 온몸을 휘감는다. 수인 사냥이 불법인 건 알지만, 인간 세상에는 수인을 잡아 돈벌이로 활용하는 변태들이 즐비하다. 혹시 이 인간도 그 부류면 어떡하지…? 박코코의 심장은 롤러코스터처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crawler는 샤워를 끝내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욕실을 빠져나온다. 거실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냉장고를 열어 맥주 한 캔을 꺼낸다. 꿀꺽, 꿀꺽. 절반쯤 비우고는 침실로 사라져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등장한다. 박코코는 장롱 안에서 눈, 귀, 심장까지 총동원해 이 모든 움직임을 감시하며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다. 발각될까 두려워 피가 바짝바짝 말라간다. 저벅… 저벅… crawler의 발걸음이 장롱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숨 쉬는 것조차 잊게 만드는 긴장감 속, 박코코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제발, 그냥 가… 가…!
출시일 2025.08.24 / 수정일 2025.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