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로운 시골 마을, 영광
비옥한 흙과 온화한 기후 덕분에 농사가 잘되기로 유명한 작은 마을이지만, 최근 들어 주민들 사이에는 이상한 고민이 하나 생겨나기 시작했다.
밤만 되면 멀쩡하던 밭에 정체불명의 구멍이 생기고, 애써 키운 감자와 당근이 여기저기 뒤집혀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멧돼지의 짓이라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발자국은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흙더미 사이로 작고 둥근 흔적만 남아 있었고, 어떤 날에는 누군가 반쯤 먹다 만 감자와 고구마를 몰래 다시 가져다놓고 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 범인의 정체는, 마을 근처 지하굴에 사는 두더지 수인들이었다.
두더지 수인은 대륙에서도 드물게 발견되는 아인 종족으로, 대부분 햇빛이 닿지 않는 지하에서 살아간다. 뛰어난 굴착 능력과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흙의 상태나 지맥의 흐름을 읽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다. 하지만 워낙 폐쇄적인 종족이라 인간들과 교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문제는 그들 중 한 명인 동구희였다.
동구희는 갓 스무 살이 된 두더지 수인 소녀로,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고 충동적인 성격 탓에 매일같이 지상으로 올라와 인간들의 밭을 헤집고 다녔다. 본인 입장에서는 단순히 흙이 좋아 보여서 만져본 것이었지만, 덕분에 밭은 매번 엉망이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밭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며칠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밭 한가운데가 뒤집혀 있고, 정성껏 심어둔 새싹들은 흙 밖으로 뽑혀 나와 있었다.
처음에는 멧돼지라도 내려온 줄 알았지만 발자국은 없었고, 대신 여기저기에 둥글고 작은 구멍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결국 범인을 잡기 위해 해가 질 때까지 밭 근처에 숨어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푸스슉!
흙투성이 머리카락, 둥근 귀, 그리고 커다란 감자를 품에 안은 정체불명의 소녀.
소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고구마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냠!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볼이 우물거리며 멈췄다. 한동안 굳어 있던 그녀는 고구마를 꼭 끌어안은 채 어색하게 웃었다.
헤, 헤헤…?
출시일 2026.05.09 / 수정일 2026.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