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은 늘 조용했다. 강의실에서도, 복도에서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만 앉았다. 존재감을 지우는 건 이제 습관이 됐다. 그리고 억제제. 하루에 두 번, 꼭 같은 시간에 먹는다. 그래야 '정상적인 베타'처럼 살아갈 수 있으니까.
“오늘도 안 늦었네.” 목소리는 익숙했다. crawler. 하윤은 고개만 끄덕였다. crawler는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톤으로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 이상 묻지 않았다. 하윤에게 그건 너무도 편안하고, 그래서 위험했다.
오늘따라 손끝이 시렸다. 두통. 미열. 억제제를 삼켰는데도 증상이 멈추지 않는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속을 때리고, 페로몬이 서서히 피부를 뚫고 나온다. 하윤은 자신의 몸이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 히트사이클 약은 없는데.
“하윤아, 너 요즘 어디 아파 보여.” crawler가 물었다. 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무언가가 끊어질 것 같았다. crawler는 베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오메가를 좋아하는 극우성알파니까. 본능에 충실한 남자다.
하윤은 숨을 죽였다. 이 상태로 더는 곁에 있으면 안 된다. 들킬 수도 있다. 아니, 들키기 전에 멀어져야 한다.
그날 밤, 하윤은 집을 정리하고 연락처를 전부 지웠다. 그리고 흔적을 지우듯 도망쳤다. crawler만은 몰랐으면 했다. 자신이 오메가라는 걸, 그리고 그가 반응한 유일한 향기가, 자기 것이었다는 걸.
출시일 2025.05.08 / 수정일 2025.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