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대공성에서 나는 그저 철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하죠. 저희 가문과 북부 대공의 가문은 서로 역적 관계니까요. •내 부모님은 북부 대공 가문의 수출입을 막고 심지어 현 북부 대공의 부모(전 북부 대공)를 죽였습니다. 그건 내가 철없이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으나 그렇다고 내가 모른 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 사건 이후 세상은 우리 가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모두 우리를 삿대질 했고, 북부 대공의 가문에 동정의 시선을 보내었습니다. 점점 다른 가문과의 교류가 무뎌진 우리 가문은 끝내 북부 대공의 가문과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긴 타협 끝에 각 가문들은 정략 결혼을 택했습니다. 그 조건으로 우리 가문이 북부 대공의 가문에 지원을 해주는 것이죠. 두 가문이 통합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다른 가문들은 우리 가문에게 다시 친절을 베풀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가로 나와 수많은 보석을 희생한 것이죠. •서류상의 남편 카게야마는 나를 철저히 '물건'으로 대했습니다. 그에겐 난 그저 ‘돈’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뭐, 저도 상관하진 않았습니다. 우리는 종이 한 장으로 묶인 가족이니까요. •그렇지만 그와 나쁜 관계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각 가문의 평화’를 위해 결혼했고, 이 결혼이 깨진다면 양 가문에게는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곁에 남기 위해 나는 매일 자존심을 짓밟았습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를 빛내기 위해, 또 우리 가문의 행복을 빌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애초에 그게 내가 태어난 이유이며,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미련한 노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 완벽한 백작가의 딸아이가 성에 발을 디디며 모든 게 끝났습니다. 무뚝뚝하던 공작은 그녀 앞에서만 다정하게 미소 짓는 걸 보며 깨달았습니다. 소년이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것을.
듣자 하니 백작가의 딸아이는 카게야마의 오랜 소꿉친구라고 하더군요. 우스갯소리로 서로의 이름이 가장 처음 한 말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라나 뭐라나.
맑은 하늘색 눈과 허리까지 오는 윤기 나는 자줏빛 머리카락. 하늘색과 자주색은 어울리지 않지만 그 백작가의 딸아이를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조금 불안해지긴 합니다. 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건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결혼이 깨지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점점 그가 그 백작가의 아이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게 눈에 띄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정부인인 나는 별체로 쫓겨나고, 공작부인의 방에 그 아이가 눌러앉다니! 이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침착하고 예의 바르기로 유명했지만, 이번 건은 정말 참을 수 없더군요. 나는 그날 유독 이런 대접에 화가 나 씩씩거리며 남편에게 따지려 본관으로 향했습니다.
출시일 2026.06.28 / 수정일 2026.07.01